하늘엔 송골매 땅엔 먹구렁이 한국의 자연사 박물관… 개발바람 몰아치는 서해 굴업도를 가다
입력 2011-11-09 00:31
굴업도는 시간이 멈춰 있는 섬이다. 이곳에서는 1960년대 이전 대도시를 제외한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자연과 동식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육지에서 보기 쉽지 않은 메뚜기과의 큰 곤충인 풀무치가 초지 사이를 날아다닌다. 이따금 매가 높이 선회하며 섬을 순찰한다. 굴업도는 화산지형을 가진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다. 지난 50여년 육지와 다른 섬이 발전하는 동안 굴업도는 그냥 버려져 있었던 덕에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그 섬이 지금 골프장을 포함한 관광단지 개발계획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다.
약한 바람이 불어 구름 한 점 없던 지난달 17일 해질 무렵 섬은 앞바다에 그늘을 드리웠다. 섬 동쪽 끝 연평산 정상에서는 면적이 1.7㎢에 불과하지만 해안선이 12㎞ 이를 정도로 구불구불하게 뻗은 섬이 다 내려다 보였다. 지는 해는 왕관모양으로 빛나면서 서해바다에 금빛 가루를 뿌려댔다. 능선의 억새도 금색으로 흔들렸다. 개머리초지 쪽에서 날아오른 매가 날개를 넓게 펴고 고공비행을 하다가 기자 일행에게 비교적 가깝게 다가왔다.
◇화산폭발의 박물관=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굴업리.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85㎞ 떨어진 굴업도에 가려면 인천 연안여객선터미널을 출발해 덕적도에서 배를 한 번 갈아타야 한다. 배 타는 시간만 2시간 반 정도. ‘굴업도 지킴이’로 통하는 이승기 한국녹색회 정책실장과 함께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김 실장은 “이들 여객선은 겨울과 봄에 각각 강풍과 안개 때문에 뜨지 않는 날이 많다”고 말했다.
바다에서 보면 굴업도는 두 개의 섬으로 보였다. 높은 곳에서 보면 개미 허리처럼 가는 목기미 백사장이 두 개의 섬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중 몇 차례 물이 가장 높게 차오를 때 섬은 둘로 갈라진다고 한다. 역시 물때에 따라 굴업도와 이어졌다가 끊어지는 토끼섬으로 향했다. 동쪽 사면의 절벽을 활 모양으로 파고든 거대한 ‘해식와’가 눈길을 압도했다. 화산재와 암석조각이 굳어 생긴 약 20m 높이의 절벽을 3∼5m 깊이로 파낸 ‘터널’이 약 120m 길이로 펼쳐져 있다. 이승기 실장은 “햇빛이 비치는 오전나절 해무(바다안개)가 절벽을 뒤덮고 있는 동안 소금기가 바위를 적셔서 약해진 바위조직을 파도가 때려 대니까 침식현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토끼섬은 오전중 왜 해무에 휩싸여 있을까. 이 부근의 수심이 서해안치고는 드물게 깊은 80∼90m에 이르는 반면 주변 바다의 수심이 10∼15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커다란 해저 골짜기로 인해 토끼섬과 주변 해상간의 기온차가 생기는 바람에 안개가 형성되는 것이다. 해저 골짜기는 이 섬이 9000만 년전 화산폭발로 형성됐음을 뒷받침한다. 문화재청은 토끼섬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종다양성의 보고=개미허리에 해당되는 목기미 해수욕장을 지나 동쪽의 연평산과 덕물산 쪽으로 향했다. 목기미 모래사장에는 살아 움직이는 사구가 있다.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종 2급인 검은머리물떼새가 봄에 알을 낳는 곳이기도 하다.
해발 138m인 연평산을 비롯해 굴업도의 산들에는 우리나라 섬으로는 드물게 소사나무 군락이 가장 많다. 군데 군데 소나무 군락이 우점한 곳도 보인다. 서어나무, 신갈나무, 이팝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생강나무, 동백, 고욤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산다. 또한 철따라 갯메꽃, 갯방풍, 모래지치, 백선, 해당화, 천남성 등의 야생화가 핀다. 굴업도는 내셔널트러스트가 지정하는 2009년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의 대상을 받았다.
용암이 날아 와 해안에 떨어져 굳은 화산탄 가운데 해골모양의 해골바위에는 바다직박구리가 구멍속에 알을 낳는다고 한다. 이승기 실장은 “그 알이 부화할 때쯤 먹구렁이가 나타나 새끼를 잡아먹는다”고 말했다. 목기미 모래해안 안 쪽 사구습지에는 미꾸리, 물방게 등 50여중의 물벌레가 살고 있음이 최근 밝혀졌다. 이동시기에 굴업도를 스쳐지나가는 도요·물떼새류가 이 연못에서 물을 마시다가 인기척에 놀라 황급히 날아가 버린다.
◇한반도의 갈라파고스?, 종 다양성의 요인= 굴업도에는 무엇보다 멸종위기 야생동식물이 5종이나 살고 있다. 먹구렁이, 매(이상 1급), 검은머리물떼새, 애기뿔소똥구리, 왕은점표범나비(이상 2급) 등이다. 굴업도에 관한 TV다큐멘터리를 본 일부 학자가 ‘한반도의 갈라파고스’라는 별명을 지었다. 그러나 굴업도는 갈라파고스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에콰도르령 갈라파고스 군도는 다른 대륙에 없고 이 섬들에만 사는 고유종의 비율이 매우 높다. 반면 굴업도는 가까운 대륙에 원래 살던 생물종 가운데 희귀해진 것들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 특이할 뿐이다.
굴업도가 한반도 자연의 모습을 오롯이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오랜 기간 사람의 개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923년 이전에는 민어파시가 열리던 번창하던 섬으로 어선 100여척이 해안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그러나 큰 태풍이 이 섬을 휩쓸고 지나간 뒤 인구가 즐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굴업도가 자연환경 가운데서도 유기물과 무기물, 빛, 온도, 물, 공기 등과 같은 비생물적 환경이 다양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지하수, 내륙습지, 모래, 초지 및 바위 등이 골고루 갖춰져 있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노태호 연구위원은 “작은 섬인데도 종 다양성이 풍부하다면 그곳의 비생물적 환경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매가 살고 있다면 사냥하기에 적합한 개활지가 있다는 것이고, 검은머리물떼새는 알을 낳는 모래사장이 발달한 덕분에 서식한다.
굴업도=임항 환경전문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