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노동, 저주의 결과 아니다”… 윤형 박사 ‘창세기에 나타난 노동의 기원’ 발표
입력 2011-11-07 17:50
노동이란 말은 긍정적 면에도 불구하고 즐거움 없는 ‘어려움’의 의미가 더 크다. 또 정신과 육체를 분리함으로써 육체노동은 차별적 언어로까지 자리 잡았다. 성경은 노동을 어떻게 말하는가. 최근 한국신학정보연구원(원장 김정우)이 개최한 제94회 가을 학술세미나에서 윤형(장신대) 박사는 ‘노동의 기원’을 발표하고 창세기에서 나타난 노동의 의미를 풀어냈다.
노동이란 말에 담긴 부정적 의미는 오늘날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희랍어 ‘당나귀의 짐’과 라틴어‘짐을 지고 비틀거림’, 러시아어 ‘노예’ 등에서 보는 것처럼 전 세계적 현상이었다. 주로 하층민들의 육체적 행위와 관련됐는데 고대 근동과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노동은 신들의 노동을 인간이 대신 진 것으로 이해됐다.
노예의 등장은 이 같은 인식을 가속화시켰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육체노동을 주로 노예의 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인간의 목적과 육체적 노동은 모순된다고 봤고, 플라톤은 인생 최고 단계를 ‘사고(이데아·Idea)’라며 육체노동과 분리시켰다.
기독교 안에서도 노동은 죄의 결과라는 인식이 많다. 창세기 3장 17절이 대표적 구절이다. 윤 박사는 이번 논문에서는 이를 반박했다. “저주는 땅 전체 및 사람의 본질인 먼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경작할 땅에만 해당된다. 동시에 여기서 사람에 대한 땅의 저항이 서술되는데, 그것은 더 이상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다스림에 반발한다(창 3:18). 이제부터 고통이 인간 노동에 추가된다. 이것이 부정적인 노동관의 핵심이다.”
윤 박사는 이어 “땅의 경작은 본래부터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인간 규정이었기 때문(창 2:5,15)에 노동은 저주가 아니다”며 “사람이 일을 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 자신이 창조 과정에서 작업자의 모습으로 일을 했다(창 1장). 이것은 인간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된다. 그러므로 노동 그 자체는 전혀 저주의 결과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노동의 본질 자체는 변한 것이 없고 상황이 변화된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노동은 처음부터 저주 아래 있지 않았으며 인간의 노동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다. 논문은 창세기 2장 5절과 15절에 대한 주해를 통해 ‘일한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지배적 폭력 행사가 아니라 오히려 땅에 대한 봉사라고 역설했다.
윤 박사는 노동의 기원을 창세기 1장 26∼28절을 통해 확인했다. “사람의 일은 바로 자연을 다스리는 것인데, 즉 창조된 세계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질서를 유지하며 실천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로부터 사람의 모든 일이 파생되며, 그것은 하나님의 이 명령에 근거한다.”
그는 사람의 노동을 창조신학적 관리계약으로 봤다. 자연을 문화의 땅으로 가꾸고 그 과정에서 창조질서에 적합한 생명관계성을 보존해야 하는 인간의 노동은 성서신학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그에게 맡겨진 생명의 공간인 땅이라는 영역 안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