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병권] 亡徵의 역설

입력 2011-11-07 17:53

중국 고대의 법가 사상을 대표하는 한비(?∼BC 233)는 동양고전 중의 하나인 ‘한비자’의 저자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전국시대 말기 끊임없이 한왕(韓王) 안(安)에게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이론을 받아들여 난세를 통일한 사람은 진시황이다. 한비는 순자(荀子)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던 동창생 이사(李斯)의 음모에 말려 투옥 중 음독 자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비자 15편 ‘망징(亡徵)’이란 제목의 글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징조로 47가지 사례를 거론하고 있어 흥미롭다. 요즘 우리사회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눈에 띄는 대목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런 것들이다.

“군주가 겁이 많아 소신대로 해내지 못하고 앞일을 빨리 내다보지만 마음이 약하여 결단을 못 내리고 생각으로는 옳다고 여기지만 결연히 그것을 실행하지 못할 경우 그 나라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군주를 오늘날 대통령쯤으로 해석한다면 국회에 계류 중인 한·미 FTA 비준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경우 혼란을 초래한다는 의미 아닐까.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모두 강하게 추진했는데 마지막 관문에서 머뭇머뭇하는 것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이런 구절도 있다. “법령 금제(禁制)를 자주 바꾸어 수없이 명령이 내려질 경우 그 나라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보수 세력의 지지로 지난 대선에서 승리한 집권당이 느닷없이 부유세를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슬그머니 꼬리 내리는 점을 지적하는 것 같다. 나라의 근간인 법령과 정책이 일관성을 유지하며 철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고금과 동서의 진리란 사실을 새삼 깨우치게 한다.

“태자가 이미 세워졌는데도 강한 적국에 새로 장가들어 정부인을 삼으면 태자의 처지가 위태롭게 되며 그렇게 되면 신하들의 생각도 바뀐다.” 왕권 중심인 고대국가와 시민권력 사회인 공화국이란 차이는 있지만 후계권력 구도의 투명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다행스러운 것은 망징의 사례 가운데 지금의 우리와 닮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는 점이다. 군주와 신하가 사리사욕과 탐욕에 빠져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는 주장이 ‘망징’ 사례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우리 상황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따라서 소신을 갖고 초지일관하며 다음 권력을 분명히 하면 건강한 나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한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