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11위와 107위, 차이는…

입력 2011-11-07 17:53


어린 시절 ‘이게 뭐야?’ 싶었던 말들이 더러 있었다. 우등상장에 쓰여 있던 ‘품행 방정’, 교장 선생님 훈화 중 ‘심심한 감사의 말씀’, 할머니가 후렴구처럼 쓰시던 ‘오십보백보’ 같은 것들이다. 방정맞은 것도 칭찬 받을 일인가? 심심한 것과 감사는 무슨 상관이 있지? 백은 오십의 배나 되는데 어떻게 같다는 거지?

초등학교 상급생이 돼 한자를 배우면서 방정(方正)과 심심(甚深)은 알았다. 하지만 오십보백보는 한참 후 맹자의 양혜왕편을 읽고 나서야 확실히 이해가 됐다. 전쟁에 나가 백보를 도망간 사람이나 오십보를 도망간 사람이나 별 차가 있을 리 없다.

느닷없이 어리숙했던 어린 시절 얘기를 꺼낸 것은 지난 주말 오십보백보란 말이 딱 들어맞는 한심한 상황을 접했기 때문이다. 지난 4일 여성가족부에선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한 2011년 성불평등지수(Gender Inequality Index) 자료를 내놨다. 전 세계 146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11위를 차지, 지난해에 비해 9단계나 상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게 뭔 소리야! 지난해에 비해 성불평등 체감 지수가 낮아진 바 없는데…. 더구나 GII 하루 전 발표된 세계경제포럼(WEF)의 성격차지수(Gender Gap Index)는 최하위권이었던 터라 더욱 그랬다. GGI는 135개국 중 107위로 지난해보다 3단계 하락했다.

여성가족부에서도 이를 의식했던지 해설을 달아놓았다. 지수 구성도 다르고, GGI는 남녀격차만 표시하는 데 비해 GII는 국가의 수준과 격차를 같이 보여주고 있어 비교하기 어렵다고 했다. GGI의 오류도 지적했다. 고등교육기관 취학률은 휴학생을 포함해 산정하는데 우리나라는 군 입대로 인한 휴학생이 포함돼 남학생이 과다 계산되는 오류가 있었다고.

이 한 가지만으로 이렇게 엄청난 차가 있을까 싶어 취재에 들어갔다. 소득격차 조항도 문제가 있다는 게 담당자 답변이었다. 2008년도 통계치를 기본으로 추계한 2010년 연소득에서 여성은 1100달러 감소하고 남성은 5900달러 상승해 남녀 격차가 무려 60%나 되는 것으로 나왔는데 이도 잘못된 것이라고. 그럼 실제는? 담당자는 우리나라는 소득격차 통계는 안 내고 있고, 남녀 임금격차는 40%라고 했다.

맙소사! 정말 오십보백보 아닌가. 비슷한 업무를 맡아도 여성들은 남성 급여의 60%밖에 못 받는데 평등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 5월 방한한 프레드릭 아서 노르웨이 외무부 여성권리 및 성평등 대사는 성별 임금격차를 노르웨이가 직면한 도전과제의 하나로 꼽았다. 노르웨이의 남녀 간 임금격차는 17%인데도 말이다.

GII도 조금만 눈여겨보면 11위라는 순위가 속빈 강정임을 알 수 있다. 여성의원비율은 14.7%, 여성경제활동참가율은 50.1%밖에 안 된다. GII 순위가 올라간 것은 모성사망률, 청소년 출산율 등이 낮은 덕분인데, 이 항목들은 성 평등 실현과는 무관하다.

여성가족부가 지난달 내놓은 2011년 한국의 성평등 수준도 100점 만점에 62.6점으로 낙제점을 가까스로 면한 점수다. 이 점수도 보건 89.1점, 교육직업훈련 75.0점 문화 정보 72.5점 등에 힘입은 바 크다. 의사결정부문은 19.2점밖에 안 된다. 국내외 성평등관련 통계들은 결국 국가 수준은 높은 편인데 남녀 격차는 크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GGI를 발표하면서 클라우스 슈밥 WEF 회장은 “세계가 (여성이라는) 잠재력의 보고(寶庫)를 무시해 성장할 수 있는 커다란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정부와 대기업, 특히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김혜림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