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정당정치] 한나라 ‘천막당사’ 쇄신의 상징 70년대엔 DJ·YS ‘40대 기수론’

입력 2011-11-07 21:44

8년 전인 2004년 한나라당 천막당사는 당시 ‘차떼기 당’으로 불리며 위기에 봉착한 당을 일거에 탈바꿈시킨 정당개혁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그 시절 천막당사는 요즘 한나라당 의원, 당직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변화와 쇄신’과 동의어였다.

그해 3월 23일 당의 새로운 수장으로 선출된 박근혜 대표는 여의도공원 맞은편 천막당사에서 임기를 시작했다. 4·15 총선까지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때였다. 당시 한나라당은 만신창이였다. 2003년 10월 불법 대선자금의 실체가 밝혀졌고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소추안 처리 후폭풍으로 정치적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당시 박 대표는 “부패·기득권 정당의 오명을 벗겠다”고 선언했다. 취임 첫날 여의도당사 현판을 내리고 천막당사로 옮겨 84일간 각종 개혁을 진두지휘했다. 당내 인사들도 똘똘 뭉쳤다. 전국을 도는 강행군도 이어졌다. 결국 한나라당은 4·15 총선에서 121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 50석도 얻지 못할 거라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으며 국민의 재신임을 이끌어낸 것이다.

천막당사가 기득권을 버리고 획기적인 정책 변화를 통한 정당개혁이었다면 1970년대 ‘40대 기수론’은 세대교체를 통한 정당개혁 사례로 꼽힌다. 70년대 초반 당시 제1야당 신민당은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이때 김대중(DJ·46)과 김영삼(YS·43), 이철승(48) 등 세 40대 의원이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중진 정치인들은 ‘구상유취(口尙乳臭)’라고 비웃었으나 71년 신민당 대선 후보는 DJ가, 74년 전당대회에서는 YS가 신민당 총재에 선출됐다. 기성 정치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의 공허함을 제대로 파고든 것이다.

지난해에도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신(新) 40대 기수론’이 대세를 이뤘다. 한나라당은 나경원 원희룡 의원과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민주당에서는 송영길 이광재 의원과 안희정 최고위원 등 486세대들이 대거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바람은 일으켰지만 정치 지형을 바꿀 만큼 강력하진 못했다.

백민정 기자 min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