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시편] 거룩한 해적(?)이 돼라

입력 2011-11-07 17:47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남긴 일화와 어록들이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어느 날 잡스는 직원들에게 ‘해군이 아니라 해적이 돼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나눠줬다. 해적은 소수다. 작은 배를 타고 거대한 파도를 헤치며 나간다. 그러나 그 소수의 해적이 똘똘 뭉쳐서 거대한 상선에 침투하여 정복하고 만다. 잡스는 직원들에게 도둑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해적들의 강인한 팀워크와 창조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회사 직원이나 핵심 참모도 단결력과 창조성이 강한 해적 같은 인물을 기용했다고 한다. 10여명에 불과한 소수의 해적이 거대한 함선을 정복한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우리도 세상의 거친 바다와 맞서 싸우고 바벨론의 함선을 정복하는 ‘거룩한 해적’이 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바다는 주로 혼돈과 위험을 상징한다. 그래서 바다나 큰물이 괴물의 일반적인 호칭으로 쓰였다(시 74:13∼14). 신약에서도 바다나 큰 풍랑은 혼돈과 공허, 하나님을 대적하는 파괴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막 4:36∼41). 바벨론 신화에 나오는 티아맛 또한 바다의 신이자 죽음의 신이었다. 그래서 고대 근동문화에서 바다나 물의 신은 질서가 아니라 죽음과 혼돈의 신, 사람을 유혹하고 공허하게 하는 신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로막고 있었던 홍해를 가르고 이집트 병사들을 수장시킨 것은 이집트의 거짓된 신들을 다 무찌르고 바닷속에 다 수장시켰다는 말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거룩한 해적’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해적은 고작 1∼20명의 인원이지만 배를 타고 거침없이 파도를 뚫고 나가서 거대한 함선을 정복한다. 우리도 이제 세상의 유혹과 바벨론의 문화와 싸워 이기는 해적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거대한 세상의 함대 앞에 사분오열되어 서로 분열하고 다투고 있지는 않는가. 공공의 목적은 외면한 채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며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만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해적의 정신이 타락하면 야쿠자가 되고 조폭이 된다. 해적도 자기 욕망이 앞서면 서로 물고 뜯고 죽인다. 서부영화를 보면 금광을 발견하고도 마지막에 서로 금 한 조각이라도 더 차치하려는 욕심에 상대방 동료를 총으로 쏴 죽이다 결국은 모두 다 죽는다. 과거 조선의 역사에서도 국가와 군주의 뜻보다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버리면 조정 안의 충신이 아니라 역적이 된다. 당신은 지금 해적인가, 야쿠자인가. 우리 앞에 펼쳐진 거친 바다를 보라. 거대한 바벨론의 함선을 보라. 그 거대한 세상의 문화와 싸워 승리하고 싶지 않은가. 저 세상의 함선을 차지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거룩한 해적’이 되어 맞서 싸우라. 야쿠자처럼 집안 식구나 형제를 괴롭히지 말고.

(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