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제도 시민참여 어디까지 왔나] 피고인 상당수 불이익 우려해 기피

입력 2011-11-06 18:10


법원과 검찰이 ‘국민을 위한 사법’ ‘국민을 위한 검찰’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스폰서 검사, 온정주의 판결, 전관예우 등으로 실추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내놓은 개혁방안이 국민참여재판과 검찰시민위원회이다. 국민의 건전한 상식과 법 감정을 재판과 수사 과정에 반영하겠다는 취지는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배심원들과 시민위원들의 의견은 구속력이 없고 권고 수준에 머물러 있어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개선해야 할 과제가 많다.

#장면1. 지난 5월 23일 부산지방법원 301호 법정. 검은색 피부의 낯선 외국인 4명이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아 재판을 받고 있었다. 피고인들은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에게 총격을 가한 혐의로 기소된 소말리아 해적들이다. 그 왼쪽엔 국민 배심원단이 앉아 검찰의 논고와 변호인의 변론을 경청하고 있었다. 일부 배심원은 피고인들의 유무죄를 판단하기 위해 궁금한 사항에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판사와 검사들은 배심원들이 이해하기 쉽게 재판의 쟁점과 증거에 대해 설명했다. 재판은 5일간 계속됐고 12명의 배심원은 국민을 대표해 건전한 상식과 양심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했다.

국민 배심원단의 평결을 들은 부산지법 형사합의5부(부장판사 김진석)는 해적 마호메드 아라이에게 해상강도살인미수와 강도살인미수 혐의 등을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나머지 3명에 대해서는 강도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징역 13∼15년의 중형 처분을 내렸다.

외국의 법정 스릴러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이 같은 장면은 2008년 1월부터 국민참여재판이 시행된 이후 달라진 우리나라 법정의 새로운 풍경이다.

#장면2. 2008년 7월 영화 ‘도가니’의 소재가 된 광주 인화학교 청각장애인 성폭행 사건의 항소심 재판이 열린 광주고등법원의 한 법정. 성폭행 가해자로 기소된 인화학교 교장에게 징역 2년6개월과 집행유예 3년, 행정실장에게는 항소기각(실형 1년8개월)이 각각 선고됐다. 재판부의 ‘솜방망이’ 판결이 나오자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의 기묘하고도 고통에 찬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일반 국민의 법 감정과는 거리가 먼, ‘그들만의 재판’은 국민으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재판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면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국민 배심원들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성범죄자들에 대해 ‘집행유예’나 ‘항소기각’의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라고 평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민의 법 감정을 고려했을 때 전관예우 관행도 먹혀들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2008∼2010년 국민참여재판에 회부된 성범죄의 실형률은 70.9%로 일반재판 실형률(45.8%)보다 높았다. 집행유예 선고율 역시 국민참여재판이 9.1%로 일반재판의 54.1%보다 크게 낮았다.

◇국민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법부=대법원은 2008년 1월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우리나라 형사소송법 역사상 획기적인 변화인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했다. 대법원은 내년에 국민사법참여위원회를 만들어 그동안의 시행 성과를 평가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최종적인 국민참여재판 형태를 결정할 계획이다. 나아가 국민참여재판 확대를 통해 실추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한다는 방침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난 9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좀 늦었지만 이것을 도입한 것은 매우 잘된 것”이라며 “이를 보다 확대해 국민들이 재판 속에 들어와서 그것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재판에 참여함으로써 재판을 신뢰하는 제도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국민참여재판은 시행 첫해인 2008년 64건, 2009년 95건, 2010년 162건에 이어 올해는 250건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법원은 형사합의부 사건의 1%에 해당하는 300건을 연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동안 91%의 국민참여재판에서 재판부 판결과 배심원의 유무죄 평결 결과가 일치했다. 재판부는 배심원의 양형의견에 구속받지 않지만 그 결과를 존중하고 있다. 만약 재판부가 배심원단의 평결과 다른 판결을 내릴 때는 배심원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 결과를 항소심에서 뒤집을 수 없다는 게 대법원 판례다. 배심원의 직무수행 만족도는 96.4%로 높게 나타났다.

◇참여재판 대상 확대하고 질 높여야=국민참여재판은 그동안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개선해야 할 과제도 많다.

판사나 검사로부터 불이익 받을 것을 우려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지 않거나 신청했다가 철회하는 피고인이 상당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판사나 검사 등 직업 법조인이 아닌 국민들의 공정한 판단을 받고 싶은 피고인에게 국민참여재판은 여전히 문턱이 높다는 의미다.

대법원이 지난해 5월 17일∼6월 4일 실시한 국민참여재판 피고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참여재판 미신청 사유 중 38.5%, 철회 사유 중 35.7%가 ‘재판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참여재판 대상자이면서도 이를 신청하지 않은 275명 중 42명(22.3%)은 ‘검사가 불이익을 줄 것 같다’고 말했고 37명(16.2%)은 ‘판사가 국민참여재판을 싫어해 불이익을 줄 것 같다’고 답했다. 철회자 17명 중 3명(21.4%)은 ‘검사가 불이익을 줄 것 같다’고 우려했고 2명(14.3%)은 ‘판사가 불이익을 줄 것 같다’는 이유를 들었다.

따라서 국민참여재판이 더욱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형사합의부 사건은 모두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피고인이나 피해자가 거부할 경우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금은 피고인이 신청하거나 재판부가 직권으로 결정해야 국민참여재판이 가능하다.

국민참여재판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현재 형사합의부 사건 가운데 살인, 강도, 강간 등 법정형이 중한 범죄로 대상이 제한돼 있으나 이를 형사합의부 사건 전체로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민참여재판은 일반 재판보다 기간도 오래 걸리고, 절차도 복잡해 판사나 검사들이 이를 꺼리는 것도 문제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해 대법원은 국민참여재판을 많이 실시한 재판부에 대해서는 해외견학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있다. 법원행정처 임시규 사법정책실장은 6일 “참여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지만 국민의 뜻에 따라 재판을 함으로써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국민참여재판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재판 일수를 늘려 사건을 충분히 심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2008년 1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진행된 국민참여재판 가운데 하루 만에 마친 경우가 90%에 이르렀다.

김재중 기자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