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풍류와 몸짓 함축의 美學 한지를 통해 말하다

입력 2011-11-06 22:01


한지와 닥나무를 재료 삼아 독특한 질감을 드러내는 회화 작업으로 유명한 함섭(69) 화백의 화력(畵歷)은 올해로 40년째다. 홍익대 미대를 나와 고교 미술교사로 근무하다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가 예나 지금이나 강조하는 예술정신은 “자신을 속이지 말고 솔직하게 그려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의 경우 울퉁불퉁하면 있는 그대로 그릴 일이지 예쁘게 그리려 하지 말라는 얘기다.

홍대 입구 작업실에서 줄곧 작업하다 2년 전 고향인 강원도 춘천으로 작업실을 옮긴 함 화백이 한지 그림 보따리를 가득 들고 서울에 왔다. 오는 11일부터 20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전시실에서 개인전을 열기 위해서다. 지난 주말 인사동에서 만난 그는 “내 생애에서 제일 큰 전시”라며 의욕을 보였다. 지난해와 올해 작업한 작품 위주로 100호 이상 대작으로만 50점을 선보인다.

작업 환경이 도시에서 시골로 바뀌어서인지 그의 작품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고향의 산과 들을 다니면서 자연과 친해지다 보니 그림이 단순해졌어요. 원래 작품이 전반적으로 밝고 색상도 강렬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오방색 대신 자연의 색을 추구하기 시작했어요. 춘천의 황톳길 언덕에서 뛰놀던 어릴 적 기억들이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거겠지요.”

이번 전시에 출품될 작품에서는 흙내음이 느껴질 정도로 황토색이 주를 이룬다. 그는 작업할 때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약재로도 쓰이는 당귀 등 전통 염료를 버무린 종이를 캔버스에 던지고 찢고 두드리는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에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만든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한국화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그 바탕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화면 속에 은은하게 숨어 있는 형체는 고향의 풍요를 암시하기도 하고, 치마를 입고 그네를 타는 여인이기도 하고, 신명나게 판을 벌이는 사물놀이이기도 하고, 삶의 애환을 그윽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판소리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풍류와 몸짓을 고풍스런 한지 작품을 통해 들려주는 함섭 식 ‘함축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서양화를 전공했으면서 한지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그는 “남들과 다른 것을 해야지 남과 똑같은 것을 해서 어떻게 살아남겠어? 한지의 깊은 맛과 오방색이 어우러진 작업이 함섭”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대작을 준비한 것도 작가로서의 힘(역량)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고. 아직 보여줄 것이 많아 75세까지는 대작 위주로 계속 작업할 것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와 함께 13일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카멜의 웨스트 브룩 갤러리에서 한 달간 초대전도 연다. 고희를 앞둔 그는 “오늘이 내 남은 생애에서 내가 가장 젊은 날인 만큼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내일에는 어떤 블랙홀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라며 식지 않는 열정을 과시했다(02-580-130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