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서민정] 말이 너무 살벌하다

입력 2011-11-06 17:37


며칠 전 사회공헌 사업을 협의하기 위해 기업 관계자를 만나러 갈 때,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 “그 사람 에프엠(FM)이니까 정석대로 설명해야 해.” 직장 후배 한 명은 나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마다 첫 마디로 “제 사수셨어요”라고 한다. 매주 월요일 오전, 팀장급 이상 회의를 할 때 가끔 농담하듯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일에 대해서는 누군가 총대를 메야 하지 않겠어요?”

말 쓰임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금세 알아차리셨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우리네 일상이 전쟁이다. 사수는 본인의 바로 위 선임자를 칭하는 군대용어다. FM은 ‘야전교범(Field Manual)’의 약자다. 이런 은유적 표현도 모자라 총대를 메야 한다라니! 나도 직장 상사(부사관 계급의 上士 아닌 上司)로부터 총대를 메 달라는 말을 들은 경험이 있다. 어떤 일이 곤란해진 상황 설명을 듣는 동안에는 ‘아, 내가 좀 어렵더라도 이 일을 맡아야겠구나’라고 판단했다가도 ‘총대’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일이 하기 싫어졌었다.

근래 2∼3주 동안 언론매체와 인터넷에서 화두였던 서울시장 선거에 대한 기사와 글에서 얼마나 많은 전쟁용어가 쓰였는지는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다. 여야 할것 없이 각 정당에는 ‘저격수’가 있다. 실정법 상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하는 건 엄연한 불법이니 각 정당을 위법행위로 고발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언론사를 허위사실 유포로 고발해야 하는 걸까.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도 매일 전쟁용어를 썼던 때가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미국과 이라크 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24시간 뉴스 방송인 CNN이 실시간으로 상황을 보도했었고, 그 뉴스를 한국의 모든 방송국이 동시통역을 해가면서 보여줬다. 그때 나와 내 친구들은 어린 마음에 영화가 현실이 된 듯했던 실제 전쟁 장면이 멋있어 보였고, 동시통역사가 쓰는 단어만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게임도 했었다.

누군가와의 대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를 통해 그 사람의 가치관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현상을 빗대는 은유나 비유는 그 현상이 지닌 본질적 속성을 말해준다.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용어는 사회의 품격을 드러낸다. 우리가 처한 수준이 말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거꾸로, 말을 통해 수준과 사고방식을 달리할 수도 있다. 장애인의 반대말을 정상인으로 쓸 것인지 비장애인으로 쓸 것인지에 따라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 드러난다. 어떤 표현이 맞는지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장애인에 대한 사고방식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도 전투에 나서는 군인처럼 바짝 긴장하고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할까? 선택은 각자 몫이지만, 바라건대 이제 제발 ‘파이팅(Fighting)!’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

서민정 문화예술교육진흥원 대외협력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