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36) 장로교 치리회의 조직
입력 2011-11-06 17:44
신자 급격히 늘어 1907년 최초 노회 조직
미국북장로교, 호주장로교, 미국남장로교 그리고 캐나다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장로교회가 소개되었다. 각 선교부는 선교지 분담 정책에 의해 각기 다른 지역에서 활동했으나 1912년에는 전국을 망라하는 하나의 치리회, 곧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게 된다. 이 장로교 총회는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기까지 몇 가지 과정을 밟아왔는데, 첫 조직은 1889년의 ‘연합공의회’였다. 당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미국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부 간의 협의체였다. 그러나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곧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미국남장로교가 한국 선교에 동참하게 되자 1893년에는 ‘선교사공의회’가 조직되었다. 이것은 미국 남·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부 간의 협의체로서 전국 교회를 치리하는 상회(上會) 역할을 했다. 1901년 9월에는 선교사와 한국인 대표가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장로교공의회’로 개칭되었다. 이때 회원은 선교사 25명, 한국인 장로 3명, 조사 6명이었고 회장은 북장로교회의 윌리엄 스왈론(William Swallen)이었다. 장로교공의회는 1901년 중요한 결정을 했는데, 노회 설립 방침 의정위원(議定委員) 및 장로교헌법번역위원을 선정하였고, 평양에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신학교 설립 건은 사무엘 마펫(S Moffett)을 교장으로 위촉하고 그에게 일임했다.
1907년 9월, 최초의 노회 탄생
호주와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는 즉각적인 노회 설립을 주장한 바 있으나 미국 남·북장로교회는 한국인 목사를 배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교사들만으로 노회 조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아 반대했다. 그러나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고 신자 수가 증가하게 되자 노회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1906년 소집된 장로교공의회는 노회 조직을 결의했고, 그 결과 1907년 9월 17일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최초의 노회가 조직되었는데, 이 노회가 ‘죠션야소교장로회 노회’였다. 이 노회를 ‘독노회(獨老會)’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회장은 마펫, 부노회장은 방기창(邦基昌·1851∼1911), 서기는 한석진, 부서기는 송인서, 회개는 그래함 리가 선임되었다. 회원은 한국인 장로 36명, 주한 장로교 선교사 33명, 찬성회원 9명 등 도합 78명이었다.
노회 조직과 함께 ‘12개 신조’를 신경(信經)으로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성경무오, 하나님의 주권,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 성령, 성례전, 불가항력적 은혜, 부활과 심판 등의 교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신경은 인도장로교회가 채택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12개 신조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소신앙문답서’(Westminster Shorter Catechism)도 교회가 마땅히 가르쳐야 할 문답서로 채택하였다. 이 노회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 7명(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서경조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을 배출했다. 당시 한국장로교회에는 785개 교회, 7만5968명의 신자, 1만8061명의 세례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목사선교사는 49명, 한국인 장로는 47명에 달했다.
7개 노회 조직 완료
제2회 독노회(1908) 당시 한국인 노회원은 59명, 선교사는 30명이었다. 제3회 독노회(1909)에는 한국인 회원 85명, 선교사 회원 33명이었는데, 이 해에는 다시 8명의 목사를 장립하였다. 제5회(1911) 독노회는 대구 남문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때 독노회 휘하의 7대리회(代理會)를 노회로 승격시키고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1911년 10월 15일 전주성밖교회에서 목사 20명, 장로 25명이 모여 전라노회를 조직하였고, 그해 12월 4일 새문안교회에서는 목사 12명, 장로 21명이 모여 경충(京忠)노회를 조직했다. 1912년 1월 6일 부산진교회에서는 목사 18명, 장로 18명이 모여 경상노회를, 1월 28일 평양신학교에서는 목사 28명, 장로 96명이 모여 남평안노회를, 2월 15일 선천북교회에서는 목사 26명, 장로 15명으로 북평안노회를, 2월 20일 원산 상리교회에서는 목사 14명, 장로 16명이 모여 함경노회를 조직함으로써 7개 노회 조직이 완료되었다.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京昌門) 안에 있는 여성경학원(女聖經學院)에서는 7노회가 파송한 목사 96명(한국인 목사 52명, 선교사 44명),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이 모여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였다. 이 총회를 ‘죠션야소교장로회총회’라고 불렸다. 이날 총회는 레이놀즈(W D Reynolds) 목사의 사회로 히브리서 10장을 본문으로 ‘장자회(長子會)’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성찬식을 거행함으로 개회되었다. 이튿날(9월 2일) 회의는 평양 서문밖의 신학교로 옮겨 속개돼 임원을 선출했다. 회장에는 언더우드, 부회장 길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 회계 방위량, 부회계 김석창씨가 각각 선임되었다. 이때부터 광복될 때까지 한국장로교는 하나의 총회로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총회가 조직될 당시 장로교회에는 7개 노회, 134개처의 조직교회, 1920개처의 미조직교회가 있었고 한국인 목사 69명, 외국인(선교사) 목사 77명, 장로는 225명에 달했다. 또 세례교인 5만3008명, 학습교인 2만6400명, 총신자 수는 12만7228명에 달했다. 교단 조직에 있어서 장로교는 감리교보다 훨씬 빨랐다. 감리교는 1930년에야 비로소 ‘조선감리교’란 이름으로 교단 조직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고신대 교수·역시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