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공열 (1) ‘역지사지’의 긍휼심에서 출발한 장애인 사역

입력 2011-11-06 00:14


나는 충남 부여에서 1948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7남매의 맏이로 몸이 불편하셨던 아버지 대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20대인 70년대부터 옥외광고물 사업을 시작했고 성공을 위해 바쁘게 살았다.

이런 내가 장애인을 돕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다. 92년 나는 유학 중인 아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 시카고를 방문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이 아는 목사님께 신세를 지고 있었기에, 그 옆집에 집을 얻어 지냈다. 장애인 사역을 하던 김동식 목사님을 만났던 것도 그때쯤이다. 김 목사님은 내게 찬양테이프를 하나 줬는데, 받아만 놓고 듣지는 않았다. 그러다 김 목사와 옆집 목사님과 함께 차를 타고 시내에 나갈 때 이 테이프를 틀어 그때 찬양을 듣게 됐다. 전신이 뇌성마비였던 장애인 가수 백일의 ‘벙어리가 되어도’란 찬양이었는데 이를 듣고 마음에 큰 감명을 받았다. “만약 내가 저런 환경 속에 처했다면 어떤 방법이든 자살하고 싶었을 텐데….” 평소에 장애인에게 관심도 없던 나는 그때부터 장애인을 돕는 일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마침 서울 서초동 집 근처에 ‘장애인전도협회’가 있었다. ㈔국제장애인문화교류협회의 전신인 이 단체에 몸을 담게 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장애인 자활에 힘을 쏟았다. 당시 이벤트시설전문업체 대표였던 나는 92년부터 사업과 장애인 사역을 동시에 감당했다. 2003년부터는 아예 동생에게 사업을 맡겼고 협회에서 5대 이사장직을 맡아 장애인을 섬기고 있다.

협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들고 이사장으로 장애인 자활, 국제교류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내 인생이 항상 순항했던 것은 아니다. 회사를 경영했던 나는 93년 함께 선교를 다녀온 지인에게 30억원대 보증을 섰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됐다. 그해도 제주에서 장애인 문화캠프를 진행했는데 돌아와 보니 억대의 빚이 생겨 있었다. 집, 상가를 비롯한 전 재산이 담보로 잡혀 있었기에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느라 잠시 장애인 사역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숨을 돌릴 만하니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97년 외환위기로 나와 우리 가족은 다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겪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내가 흔들림 없이 장애인 사역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긍휼’에 대한 마음 때문이다. 평소 나는 ‘역지사지’의 원칙을 품고 산다.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하면 긍휼의 마음이 생기곤 한다. 인생의 부침을 여러 번 겪었던 내가 이런 마음을 갖고 살게 된 데는 신앙의 역할이 컸다.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기 때문이다.

독실한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내가 평소 외우면서 깊이 묵상하는 말씀이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구역예배와 가정예배를 드렸던 나는 전도가 친숙했고 또 이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이는 나의 모든 사업과 행사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일까. 지금도 나는 장애인 문화 캠프와 문화학교를 진행할 때 자연스럽게 복음을 증거하며 이들에게 미칠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한다.

◇약력=1948년 충남 부여 출생. ㈔2002월드컵기독시민운동협의회 사무총장, 전국장로회연합회 부회장 역임. 현 ㈔국제장애인문화교류협회 이사장,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상임부회장,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총무. 서울 서초동 늘푸른교회 장로.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