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드문 이별시 모음…18년만의 귀환 성형외과 의사 나해철 시집 ‘꽃길 삼만리’
입력 2011-11-04 17:25
1980년대 ‘5월시’ 동인으로 활동했던 나해철(55·사진) 시인이 93년 이후 18년 만에 여섯 번째 시집 ‘꽃길 삼만리’(솔출판사)를 냈다.
서울 압구정동에서 성형외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사이기도 한 그의 이번 시집은 우리 시대에 드물게 아름답고 처연한 이별시 모음집이다. 시집 어디를 펼쳐 봐도 이별가가 아닌 게 없다. “미안하오/ 새벽 세 시 십사 분에 미안하오// 웃게 하다 울게 하고// 너무 많은 일을 같이해/ 하는 일마다 생각나게 해서// 그대가 지은 밥을/ 맛있게 먹은 기억을 남겨서// 으스러지게 안아서// 사랑해서// 미안하오/ 낮 열두 시 삼십이 분에 미안하오”(‘미안하오’ 전문)
헤어진 옛 연인에게 부치는 짧은 편지를 떠올리게 하는 시편들은 극서정시 류(流)의 정제된 언어가 압권이다. 하지만 이토록 지극한 이별 노래들을 그렇게나 오래 가슴에 담고 살아왔다는 사실에서 그는 무릇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메스만 잡은 게 아니라 자신의 문학적 인큐베이터 속에서 시를 배양해왔던 것이다.
“죽어서 헤어지는 것 보담/ 살아서 한 이별은/ 대수롭지 않아 라고 말하지 마오// 살아서 한 이별 때문에/ 죽기도 하니// 죽어야/ 진정으로 끝나는 이별도 있으니”(‘어떤 이별’)라든지, “사랑하는 사람아// 울지 마오/ 눈물 흘리지 마오/ 용서가 엄중하게 찾아올 사람은/ 그대가 아니라/ 한때 그대를 사랑한 나이므로”(‘용서’ 일부) 등 시인은 편편마다 이별에 대해 말하지만 죽기 전에는 결코 이별을 완성하지 못한다는 심상이 반영돼 있다.
일찍이 전남 나주의 영산강 포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인은 서정에 기대어 평생을 살자 했건만, 늘 수술 스케줄에 쫓기며 사는 집도의의 피 묻은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압구정동 빌딩 숲에서도 서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라 스스로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인다. “도시에/ 평생 붙잡힌 나/ 문득// 빌딩 숲이 산이요/ 도로가 계곡물이더라// 병 든 것인가/ 위로를 받은 것인가// 도시에서도 이렇게/ 마음 고요한 것// 사람이/ 토끼고 고라니고/ 꽃이더라”(‘도시에서’ 부분)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