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어 녹여 차곡차곡 쌓아올린 서정… 건축기사 박순호 시집 ‘헛된 슬픔’

입력 2011-11-04 17:24


박순호(38·사진) 시인은 생활의 배후에 얼룩져 있는 흔적들에서 시적인 순간들을 잡아낸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왜 자신이 시를 써야 하는지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으로 바뀐다. 그는 평범한 생활어 수준의 시어에 형이상학적인 아우라를 입히는 시인인 것이다.

“어깨에 털어내고 남은 눈송이가 따라 들어온다/ 축축한 외투를 받아줄 아내는 외출 중이다/ 귤 바구니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가/ 냉랭한 집 안을 채우고/ 외로움처럼 침이 고인다/ 내일이나 오겠다는 아내의 문자를 다시 읽으며/ 귤을 까먹는다/ 온기가 돌기 시작하는 거실에 누워/ 텔레비전에 눈을 박아놓고 귤껍질을 벗긴다/ 밥 생각이 없다// 밖에는 눈이 퍼붓고”(‘귤을 까먹으면서’ 전문)

생각건대, 밖에 눈은 오는데 아내는 외출 중이고 아직 아이가 없어 적적하기 그지없는 실내는 외로움이 팽창한다. 누군가 외로움을 탈 때 그 주변의 사물인 귤에서도 외로움의 맛이 나기 마련이다. ‘밥 생각이 없다’는 구절과 ‘침이 고인다’는 구절은 서로 상반되는 듯하지만 결과적으로 시적 화자의 고독한 귀가의 느낌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는 시인의 말 부리는 솜씨가 어지간히 무르익고 있음을 반증한다.

“가지런한 초콜릿 한 조각을 떼어 입 속에 넣어본다/ 녹아 없어져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던 어머니/ 더욱 견고하게 굳어져서 내게 대물림되고/ 녹지 말아야 할 것은 여리고/ 순한 초콜릿 한 조각이었다”(‘초콜릿와 어머니’ 일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가슴에 착착 쌓인 한(恨)이 어찌 그리 많은지, 녹아 없어져야 할 것이 많다고 말하지 않던가. 어머니가 녹여내야 한다는 그것은 시인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돼 오히려 더 견고하게 굳어져 있다. ‘녹다’와 ‘굳다’라는 대조적인 단어 조합을 통해 어머니에 얽힌 기억을 풀어냄으로써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말하자면 박순호는 어떤 온도에서 녹아야 시가 되는지에 관한 문학적 멜팅 포인트(melting point·용융점)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건축현장기사로 늘 안전모를 쓰고 살면서도 생활어를 녹여 삶의 배후를 벗겨내는 솜씨가 믿음직하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