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풀어낸 ‘재해 악몽’ 9가지 이야기… 강영숙 신작 ‘아령 하는 밤’

입력 2011-11-04 17:24


소설가 강영숙(44)의 신작 창작집 ‘아령 하는 밤’(창비)은 재해에 대한 악몽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아홉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올해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단편 ‘문래에서’는 구제역을 소재로 삼는다. 철공소 거리로 이루어진 문래에서 남편의 직장 때문에 이사를 온 Y지역은 가축의 피로 땅이 물들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재해의 공간이다.

“야산 입구에서부터 마스크를 쓰고 비닐옷으로 중무장한 공무원들이 출입을 통제했다. 그들은 내게 돌아가라고 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긴 막대기만 휘둘렀다. 혀가 몹시 아팠고 너무 무서웠다.”(26쪽)

돼지 2000마리를 살처분한 Y지역은 가축에게도 사람에게도 죽음의 땅이다. 논바닥 위에 죽어 있는 새들과 계곡 주변에 얼어붙어 있는 핏물, 매일 지독한 냄새를 묻히고 돌아오는 남편, 도살한 가축을 싣고 가는 검은 휘장의 트럭 이미지는 인간의 이기주의가 빚은 생태계 파괴의 비참을 고발한다.

단편 ‘프리퍄트창고’엔 어머니로부터 청계천에 있는 창고를 물려받은 여자가 등장한다. 창고는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에 황학동의 기억과 물품들을 모아놓은 공간으로, 여자에 의해 프리퍄트라고 명명된다. 프리퍄트는 원전 사고가 난 체르노빌 근교의 도시 이름이다. 열 살 때 체르노빌 사고를 접한 뒤 자신의 세대가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세대가 될 것이라고 믿는 여자는 체르노빌 아이들처럼 자신도 잠재적 암환자라는 두려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2007년, 2008년, 2009년… 숫자가 하나씩 물결처럼 겹치며 흘러 사라졌다. 나는 조금 더 늙었지만 아직 갑상선암에 걸리지는 않았다. 나는 가끔 밤에 내 고향인 프리퍄트로 걸어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191쪽) 이렇듯 자신을 잠재적인 암환자로 인식하는 주인공의 내면에는 문명의 재해를 민감하게 인식하는 이들 세대의 불안과 공포가 깃들어 있다.

‘재해지역투어버스’는 허리케인으로 삶의 터전이 무너진 미국 뉴올리언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루한 서울에서 탈출하기 위해 뉴올리언스로 관광 온 여자는 여느 뒷골목에서나 들려오는 트럼본 소리에 그곳이 정말로 재해를 당한 도시인지 믿지 못한다.

“스페인풍의 건물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에서 막 녹기 시작한 갈색 설탕 냄새가 났다. 베이스 트럼본 소리가 프렌치 시장 골목 쪽에서 들려왔다. 달고 진한 설탕이 입속으로 녹고 있는 것 같았고 내 몸조차도 갈색으로 녹여버릴 듯한 공기가 나쁘지 않았다.”(108쪽)

이런 선입견은 씨티투어버스를 타고 재해 지역을 들여다보면서 깨지고 만다. 박살난 집, 부러진 전신주, 길에서 나뒹구는 앤티크 가구와 간판들, 들쑤셔진 보도블록 등은 끔찍했던 재난의 순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재해 자체보다 재해 이후이다.

뉴올리언스의 흑인들은 슬프고 장중한 장례식 뒤에도 깔깔거리는 웃음이 나오는 밝은 재즈곡을 연주한다는 말을 되새기는 주인공은 1901년 태어나 뉴올리온스에서 음악을 시작한 루이 암스트롱의 옛 공연장을 찾아간다.

“공연의 막바지, 어린아이를 데리고 걸어나온 뮤지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의 굵은 입술이 트럼펫을 불기 시작한다. 나직하고 부드럽다. 1963년에 내가 사는 도시에 왔었다는 유명한 재즈 연주가,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후 홀로 소년원에 들어간 그는 소년원 밴드에서 처음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마흔 살이 되도록 자기만의 크리스마스트리를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도 흑인 광대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사람, 그가 불렀던 노래 ‘What a Wonderful World’.”(128쪽)

1963년 방한하기도 했던 루이 암스트롱에게 세상은 정말 멋진 곳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의 조상은 월급 20달러를 받던 노예였다. 그럼에도 그는 ‘What a Wonderful World’라고 노래 부르지 않았던가. 재난과 재해로 점철된 일상에도 불구, 우리는 ‘얼마나 멋진 세계인가’라고 암스트롱식으로 절규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결말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해도 강영숙의 정직한 비관주의는 섣부른 희망보다 미덥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