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한승주] ‘혼돈의 제왕’

입력 2011-11-04 17:44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 최근 며칠간 전 세계는 그의 말 한 마디에 출렁거렸다. 그의 ‘도박’은 10월 31일(현지시간) 시작됐다. 지난주 유럽 정상들이 어렵게 합의한 그리스 구제금융안 수용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것이었다. 느닷없는 일이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회원국과 사전 협의도 없었다. 측근들도 몰랐다. 철저한 ‘단독 플레이’였다. 그리스 경제를 책임지는 재정장관은 너무 놀라 몸져누웠다.

그리스는 구제금융을 받지 않으면 국가부도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니? 정부의 긴축 재정안에 반대해 연일 시위를 벌이던 국민들마저 당황했다. 이는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여졌다. 프랑스 독일로서는 유로존도 아닌 나라에 거대한 돈을 지원할 이유가 없다.

구제금융 수용 국민투표가 부결되면 그리스는 국가부도에 빠지고, 그 여파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에까지 미칠 것이다. 유럽이 무너지고 미국 경제가 흔들리면 전 세계 경제까지 혼란스러워진다.

그런데도 그는 위기를 실감하지 못했다.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국민투표에 자신의 직을 걸겠다고 했다. 의회에서 신임을 확인받겠다고 했다. 하지만 여당인 사회당조차 그에게 등을 돌렸다. 3∼4일 프랑스 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그리스 때문에 혼돈에 휩싸였다. 그는 유럽 정상들이 소집한 긴급회의에 소환됐고, 이런 식으로 나가면 한 푼도 지원해 주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그는 사흘 만인 3일 자신의 도박을 스스로 철회했다. 하지만 국민투표 철회 선언이 불안을 잠재우진 못했다. 수십년간 친정부적이었던 언론조차 등을 돌렸다. 그리스의 한 신문은 그를 ‘The Lord of Chaos(혼돈의 제왕)’라고 칭했다. ‘국민투표는 자살행위’라는 극단적 표현도 나왔다. 유럽 정상들은 “차라리 그리스는 유로존을 떠나라”고 비꼬았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하다. 자진사퇴 요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혼돈의 제왕’을 넘어 세계경제에 ‘민폐의 제왕’이 되려 하는가.

한승주 차장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