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국어의 힘’ 펴낸 영어학자 김미경 교수] “조선시대 공식어는 한문 이젠 영어가…”
입력 2011-11-04 17:25
책은 이런 주장을 한다. ①한반도는 2000년간 이중언어 사회였다 ②1948년 이후 한국 발전의 동력은 한국어였다 ③영어 헤게모니 때문에 한국어가 흔들리고 있다. 이중언어 사회란 두 가지 언어가 통용되는 사회다. 특정 집단이 두 언어를 쓰거나, 한 언어를 쓰는 여러 집단이 공존하는 사회. 한반도가 이중언어 사회(①)였다니, 이건 처음 듣는 얘기다. 세계화 시대에 ‘한국어만 하는 사회가 힘’이라는 주장(②)은 반쯤만 수긍이 간다. 영어가 한국어를 밀어낼 거란 말(③) 역시 엄살로 들린다.
김미경(52) 대덕대 교양과 교수는 30여년 영어를 공부해온 영어학자다. 2006년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한글’을 낸 뒤 ‘영어학자가 왜?’라는 질문에 시달렸다는 그녀가 5년 만에 ‘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한국어의 힘’(소명출판)을 냈다. 똑같은 걸 물었다. 영어학자가 왜? 그는 “대입, 취업, 승진에서 영어 헤게모니는 거대하다”며 “영어의 권력이 얼마나 큰지 (영어학자인) 나는 느끼는데 다른 사람들은 못 느끼는 것 같아서 그 얘기를 하려다가 한국어까지 가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2000년간 한국어 말고 대체 어떤 언어가 쓰였다는 건가.
“일상에서 생활어는 언제나 한국어였다. 앞으로도 한국어일 거고. 하지만 법적 효력과 권위를 갖는 공식어는 한국어였던 적이 없다. 조선시대까지는 한문(혹은 이두문)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어, 미 군정기엔 영어였다. ‘한자’가 아니라 ‘한문’이다. 한문이라는 중국어 문법을 적용한 중국어 문장을 쓴 것이다. 옛날 왕과 조정 대신들의 대화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국지어음(國之語音)이 이호듕귁(異乎中國)하야’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겠나. 그건 전형적인 중국어 ‘크리올(두 가지 언어의 혼합어)’이다. 다른 언어라는 얘기다. 백성들 생활어는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였을 테고. 좀 다르긴 하지만, ‘디스 컨트리는 차이나와 디퍼런트하여’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걸 일반 민중이 알아들었겠나. 지배층은 두 언어를 쓰고, 백성은 한 언어를 쓴 전형적인 이중언어 사회다.”
-과거 조선이 이중언어 사회였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한문을 몰랐던 다수는 공적 공간에서 배제됐다. 벼슬에 못 나가고 재산도 보호받기 어려웠다. 한문으로 쓰이지 않은 모든 문서는 법적 효력이 없었으니까. 이중언어 체제에서 공식어를 모르는 민중은 불이익을 받는다. 언어 때문에 차별을 받은 거다. 그래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한국어가 공식어가 됐다는 건 대단한 의미가 있다. 한국인의 모국어는 한국어다. 모국어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쉬운데 사람은 모국어로 생각하고, 모국어로 상상하고, 모국어로 모든 창의적 활동을 한다. 모국어로 듣고 말하고 이해할 때 가장 생산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다. 60년 전 모든 한국인이 자신의 모국어인 한국어로 교육받고 공적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비로소 언어 민주화가 이뤄진 것이다. 그게 지난 60년간 우리가 이룩한 비약적 발전의 원동력이다. 한국어는 민족어여서 중요한 게 아니라 모국어여서 중요한 거다.”
-단일언어 사회의 경쟁력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중언어 사회가 치르는 사회적 비용을 보면 알 수 있다. 필리핀에서 국민을 상위층과 하위층으로 가르는 게 영어능력이다. 영어를 잘하는 소수가 정치·경제 기득권을 독점한다. 영어가 권력의 도구인 거다. 흔히 모국어와 영어를 다 쓰는 이중언어 사회가 되면 모두 영어를 저절로 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일부에서 영어공용화론을 내거는 이유도 ‘영어를 싸고 쉽게 배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다. 착각이다. 영어와 타갈로그어를 공용어로 하는 필리핀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인구가 7%에 불과하다. 영어가 공용어가 된 지 100년이 넘은 나라가 이 정도다. 흔히 싱가포르를 이중언어의 성공사례로 꼽는다. 싱가포르에서 영어 가능자는 80%나 되지만 그들이 쓰는 영어의 상당 부분이 싱글리시(Singlish·중국어와 영어를 섞은 변종 영어)다. 150년 이상 영국 식민지를 겪고 50년 이상 독재에 가까운 언어정책을 써서 얻은 결과가 그거다. 영어공용화가 이뤄진 지 200년이 넘은 인도도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인구가 0.02%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도 영어 능력은 현실적으로 필요하다. 한국어를 배운 뒤 배우는 것이고.
“모든 국민이 한국어를 다 잘하고 영어도 잘하면 좋을 거다. 하지만 영어 배우느라 한국어 능력이 떨어진다. 특히 고학력자의 모국어 능력이 떨어진다. 2001년 조사결과 한국 대졸 성인의 문해력(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였다. 정치인 연설문을 보거나 대학생 독후감을 읽으면 정말 절망적이다. 그런데도 2007년 한국 부모가 영어 사교육에 들인 돈이 자그마치 15조원이었다. 전체 공교육비의 57%다.”
-그래도 한국어의 지위까지 걱정하는 건 기우 아닌가.
“언어는 사용자가 1만명 이하이고 기록할 문자가 없을 때 사라진다. 한국어는 7000만명이 쓰는 세계 16번째 언어다. 한국어는 지난 2000년 동안 사라지지 않았듯, 앞으로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내가 걱정하는 건 공식어로서 한국어가 힘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어가 공식어로, 공적 생활에서 힘을 갖게 된 게 고작 60년이다.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 헤게모니가 지금처럼 커지면 과거로 회귀할 수가 있다는 걸 지적하려는 것이다.”
-공식어로서 한국어의 지위가 흔들리는 징후가 있나.
“영어 점수가 높은 사람에게 모든 혜택이 돌아간다. 영어 잘하는 10%가 이득을 나눠가지는 구조다. 영어 점수 하나로 대학에 가고, 토익시험으로 취업과 승진이 결정되고, 대학에서는 영어 강의를 해야 인센티브를 받는다. 최근 한국·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의 한국어본 번역에 오류가 많다고 해서 시끄럽지 않았나. 상징적 사건이다. 외교관들은 어차피 외국인과는 영어로 협상하고 영어본을 기준으로 할 건데 한국어본의 오류는 사소한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들에게 공식어는 이미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