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순간을 담은 이 사진들…
입력 2011-11-04 17:53
퓰리처상 사진/핼 부엘/현암사
권총 찬 경찰관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셔츠와 바지가 당겨지고 바짓단이 살짝 들렸다. 소년의 목은 뒤로 젖혀졌다. 둘의 시선이 만났다. 소년과 경찰관, 둘은 지금 ‘대화’ 중이다.
1957년 9월 10일 사진기자 빌 비올은 미국 워싱턴의 한 축하행진에서 경찰관 모리스 컬리네인과 두 살 소년 앨런의 만남을 사진에 담았다. 이듬해 퓰리처상 사진부문 수상작 ‘차이나타운의 소년과 경찰’이다. 컬리네인은 나중에 기자에게 “차도로 다가가는 앨런에게 안전하게 인도에서 구경하는 게 좋겠다고 설득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걱정 많은 경찰과 호기심 넘치는 소년, 운 좋은 사진기자가 “퓰리처상 수상작 중 가장 기분 좋은 사진 중 하나”(핼 부엘)를 만들어낸 것이다.
① 만남
안타깝지만, 이 사진 한 장이다. 퓰리처상 70년 역사를 한 권에 담은 사진집 ‘퓰리처상 사진’을 넘겨보면, ‘차이나타운의 소년과 경찰’은 드물게 기분 좋은 사진이다. 1942년 퓰리처상에 처음 사진부문이 생긴 이래 올해까지 꼬박 70년. 퓰리처상이 ‘그해의 사진’으로 뽑은 수상작들을 한데 모으면 지진, 허리케인, 홍수 등 자연재해부터 파업, 폭동, 사고, 화재, 전쟁, 쿠데타, 암살, 기아, 질병, 피난까지 인간 비극의 연작이 만들어진다. 총과 피, 폭력과 재난의 70년이다. 저자는 “역사는 아름다움보다는 피로 쓰인다”고 말했다.
② 경악
좌우익 학생들이 격렬하게 충돌하던 1960년 10월 12일 일본 도쿄. 미·일 상호방위조약 토론회장에 나선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 앞으로 청년 한 명이 돌진한다. 손에는 사무라이 검이 들려 있다. 안경을 떨어뜨리며 경악하는 아사누마와 그의 복부를 향해 검을 일직선으로 내지르는 교복 입은 청년, 손을 뻗는 보좌진. 마이니치 신문 사진기자 나가오 야스시가 찍은 ‘무대 위의 암살’은 마치 무대 위 사무라이들의 활극을 찍은 듯 연극적이다. 아사누마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 세상을 떠났다.
③ 공포
1954년 4월 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교 허모서비치.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에 비명소리가 울렸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사진기자 존 곤트가 잡아낸 건 높게 일렁이는 파도를 배경으로 어쩔 줄 모른 채 헤매는 부부. 바다를 등진 채 남편 셔츠를 잡은 아내의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다. 남편은 매달린 아내를 의식조차 못한 듯 바다 쪽을 망연자실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해변에서 놀던 19개월 된 아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아이의 시체는 그날 늦게, 1.6㎞ 떨어진 바닷가에서 발견됐다.
④ 슬픔
저자는 “매우 단순하고 직접적이어서” 제목도, 사진설명도 필요 없는 사진이 있다고 했다. 힘줄이 가득 돋은 앙상한 손과 여윈 몸뚱이가 비석을 부둥켜안고 있다. 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여인은 흐느끼는 모양이다. 왼팔에 묻은 얼굴과 웅크린 어깨를 보면 그녀의 울음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하얀 비석은 누군가 세상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인의 슬픔 역시 새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지금 막 밀려드는 슬픔을 붙잡고 온몸을 흔들며 울고 있는 중일 것이다. 1983년 전몰장병 추모일(미국의 현충일)에 한 묘지에서 망원렌즈로 잡은 앤서니 수아우의 ‘추모’. 비석 속 사망일이 한 해 전인 1982년 9월 11일이다.
⑤ 기적
하필 그때, 그곳에서, 어쩔 수 없이 목격해버리는 일들이 있다. 난간을 들이받은 트럭이 다리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12m 아래는 바위투성이 호숫가. 운전석 바퀴가 기적적으로 트레일러에 걸렸다. 뒤따르던 차량 운전자들이 밧줄을 찾아 달려왔다. 그렇게 끊어진 난간 사이로 밧줄이 던져지고 허공에 매달린 운전자는 밧줄을 타고 기적적으로 구출됐다. 그 순간, 트럭은 트레일러에서 분리돼 추락한다. 사진을 찍은 건 한 차량의 운전자. 1년 전에 필름을 넣어둔 낡은 카메라로 찍은, 렌즈도 초점도 맞지 않은 사진이 기적의 순간을 담았다.
⑥ 체념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 마냥, 어느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다. 눈빛에서는 절망도, 희망도 읽을 수 없다. 모자의 얼굴은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듯 담담하다. 아기는 사진을 찍은 몇 시간 뒤 세상을 떴다. 스탠 그로스펠드의 ‘기아’는 세계가 기억하는 1984년 에티오피아 가뭄의 한 장면이 됐다.
⑦ 기다림
“유난히 운이 좋고 그날 따라 특별한 행운이 따라와서 탄생하는” 사진은 드물다. 저자는 대다수 사진들은 “9시 출근, 5시 퇴근이라는 안전한 생활을 기꺼이 포기하고, 거칠고 위험천만한 장소에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날들 동안 장시간 일할 각오가 된, 비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엄청난 준비와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한 가족을 1년 반 동안 지켜보고(프레스턴 개너웨이의 ‘나를 잊지 말아요’), 학생에서 참전군인이 되기까지 2년의 여정을 동행하는(크레이그 F 워커의 ‘이언 피셔:미국 군인’) 기다림이 쌓여 70년의 기록이 됐다. 박우정 옮김.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