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송라이터 정엽 “인기 실감 못해…난 아직 멀었다”
입력 2011-11-04 08:30
싱어송라이터 정엽(본명 안정엽·34)에겐 추억의 노트가 한 권 있다. 해군 홍보단에 복무하던 2000년대 초반에 만든 이른바 ‘카피(Copy) 노트’다. 가수의 꿈을 좇던 ‘군인’ 정엽은 각 페이지마다 닮고 싶은 해외 뮤지션들 노래 가사를 옮겨 적었다. 그리고 비슷하게 부를 때까지 연습, 또 연습했다.
당시 그가 ‘스승’으로 삼은 가수는 제임스 잉그램, 스티비 원더, 맥스웰, 프랭크 맥콤 등. 스스로 정한 목표치에 근접해야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그는 자기 자신과 싸웠다. 제대할 때 그의 손엔 100장을 꽉 채운 ‘카피 노트’가 들려 있었다. 지금의 정엽을 있게 한 ‘역사’의 페이지들인 셈이다. 현재 정엽은 음색과 발성, 창법 등 가창의 모든 영역에서 독보적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가수다.
하지만 2003년 데뷔한 그가 이름을 알린 건 불과 최근 1~2년 사이. 특히 올해 ‘나는 가수다(나가수)’ 원년 멤버로 활동한 것이 주효했다.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CF도 찍었고, 지난해 10월부터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푸른밤, 정엽입니다’(‘푸른밤’)도 인기가 치솟아 청취율 1위를 달린다. 하지만 정엽은 당최 자신의 위치와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난 1일 서울 논현동 작업실에서 마주 앉은 그는 “그냥 식당 아주머니가 알아봐주시는 정도”라며 자세를 낮췄다.
-왜 스타라는 걸 인정 안 하나.
“무엇보다 실감을 못 하겠다. 내 장점은 내 위치를 객관적으로 안다는 건데, 아직 멀었다. 집에서 나와 천천히 걸어 이제 막 올라야 할 산 입구에 도착한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대중가수로서, 뮤지션으로서의 지금 내 위치가 현재는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걸어왔다’는 표현처럼 ‘브라운아이드소울’로 데뷔한 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급한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었다. 데뷔 이후 한참 동안 ‘브라운아이드소울’은 ‘나얼과 아이들’처럼 여겨졌다. 멤버 각자가 개성 뚜렷한 아티스트인데 나얼만 부각됐지 않나. 답답할 때가 많았다. (나얼과 인지도 등에 있어)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날 인터뷰는 최근 발매한 그의 정규 2집 ‘파트 Ⅰ:미(ME)’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음반에 실린 곡은 모두 이별 노래. 정엽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창법,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음색으로 실연의 슬픔을 절절하게 노래했다.
-그간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토록 슬픈 노래만으로 음반을 채운 건지 궁금하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만들다 보니 이별 노래가 많이 나왔고, 다른 느낌의 곡을 넣어서 음반 색깔을 흐리기보다는 (이별이라는) 하나의 콘셉트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전체적으로는 대중이 원하는 음악, 내가 원하는 음악의 접점을 찾고 싶었다.”
-원래 신보는 지난 5월쯤 출시될 것으로 알려졌는데 늦어진 이유가 있나. “너무 바빴다. 매일 라디오 생방송에다 주말엔 각종 행사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올해 들어 하루를 온전히 음악에만 투자한 날이 거의 없었다.”
-김건모 백지영 김범수 등 ‘나가수’ 출신 가수들이 방송을 통해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발표한 신곡들 성적은 예상에 못 미쳤다. 본인 입장에서도 부담이 적잖았을 것 같은데. “음악을 실제 구매하는 사람과 ‘나가수’를 좋아하는 시청자 사이엔 간격이 있다. ‘나가수’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음반 성적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는 건 무리다. 음반에 실리는 음악과 달리 ‘나가수’는 절제를 버려야 하는 무대이지 않나. 음반에 대한 선호도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가수’에 다시 출연할 의향이 있나. “재밌을 것 같다면 한 번쯤은 가능하지 않을까? 많은 걸 가져다준, 대중 아티스트로서의 폭을 넓혀준 프로그램이니까.”
작업실 한쪽에는 ‘푸른밤’ 애청자들이 최근 청취율 1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 보내준 대형 패널이 비치돼 있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푸른밤’으로 옮겨갔는데, 정엽이 이 프로그램에 갖는 애착은 음악에 갖는 애정만큼이나 대단해 보였다.
-지난달 방송 진행 1년을 맞았는데 소감을 말한다면. “라디오 DJ는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나의 ‘로망’이었다. ‘정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현실감 없는 꿈처럼 생각됐다. 그런데 제의가 왔고, 현재는 가장 잘하고 싶은 분야가 됐다. 요즘처럼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목소리 하나로 서로 교감하는 라디오라는 공간이 정말 좋다. 롱런하고 싶다.”
-‘푸른밤’ 코너 중에서 이민정 김하늘 한지민 등 당대 톱 여배우들이 거쳐 간 코너 ‘여배우들’이 화제다. 출연자 중 이상형을 꼽자면. “없다. 실제로 보면 그냥 연예인 같다. 현실감이 안 느껴진다. 수십 명이 출연했지만 전화번호 물어본 적도 없다. 주변 지인들은 나를 많이 부러워하는데, 나는 (‘여배우들’이 방송되는) 수요일이 가장 부담스럽다.”
-그래도 인상 깊은 여배우가 있다면 누군가.
“첫 게스트였던 김정은씨가 기억에 남는다. 그때 난 ‘초짜’ DJ였는데, 그런 나를 정말 잘 이끌어주셨다. 편안했다. 홍수현씨는 되게 예쁘더라. 물론 나머지 분들도 다 예뻤다(웃음).”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