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의구] 그리스의 국민투표 몽니
입력 2011-11-03 17:43
그리스 경제위기를 지켜보노라면 10년도 더 지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기억이 새롭다.
1997년 여름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국내 시장으로 파급되면서 환율이 폭등하고 주가가 추락하는 금융혼란이 빚어졌다. 단기외화차입 비중이 높은데다 당국의 외환 관리 미숙으로 외화유동성이 바닥나면서 정부는 11월 21일 IMF 구제금융 신청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이후 우리 국민에게 찾아온 현실은 참담했다. 대우그룹을 비롯해 삼미 대농 쌍방울 동아 한라그룹 등 굵직한 기업들이 추풍낙엽처럼 도산했다. 동화 동남 대동은행 등 대형 금융기관들도 퇴출됐다. 주가가 280선까지 떨어졌고, 환율은 2000원대, 금리는 29%까지 치솟았다. 한때 180만명의 실업자가 양산됐고 98년 전년보다 42%나 늘어난 8569명이 생활고에 목숨을 끊었다.
자구책 요구에 반발만 말고
그러나 대규모 시위나 국민적 저항은 없었다. 구제금융을 내주면서 IMF가 혹독한 고금리와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 살인적인 긴축 정책을 강요했고, 방만한 기업경영과 관료사회의 부패 등을 언급하며 식민지 총독처럼 행세했지만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전 총리는 IMF가 아시아에만 무자비한 희생을 요구한다고 비판하며 구제금융을 거절하고 고정환율제를 채택하는 독자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우리는 IMF 권고를 수용했다.
우리 국민이 순둥이였던 것만은 아니다.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졌고,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나 헌옷가지 모으기 등 자발적 애국 운동이 전개됐다. 그 결과 1년여 만에 금융시장이 전반적인 안정을 되찾았고, 4년도 안 된 2001년 8월 구제금융체제에서 벗어났다.
2011년 그리스의 풍경은 이와 많이 다르다. 1차 구제금융과 함께 혹독한 긴축과 감원을 요구받자 이에 반발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사태의 책임이 부유층과 고위층에 있다면서 ‘우리 빚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국론분열 양상도 빚어지고 있다. 급기야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는 유로존 탈퇴를 배수진으로 친 뒤 2차 구제금융 수용 여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나왔다. 그의 전략이 여론의 분열을 정리하려는 고육책일 수도 있고, 유로존 내에서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펴지 못한 채 자구책을 강요받는 데 대한 항의의 표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것은 위정자에게 부여된 책무를 방기하는 것이며, 정치력을 포기하는 행위다.
그리스의 몽니로 세계경제는 또다시 불확실성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혹 투표가 부결된다면 그리스는 국가부도를 맞을 공산이 크며, 세계경제에 더 큰 민폐를 끼치게 된다. 이탈리아 등 다른 유로존 국가에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 수틀린다고 유럽공동체의 판까지 깨고 나오는 것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복지잔치 청산기회로 삼길
무엇보다 그리스의 위기는 ‘복지 잔치’에서 비롯됐다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국가 재원을 성장을 추동하고 고용을 창출할 수 있도록 적절히 배분하지 않고 당장 먹고사는 데만 썼기 때문이다. 복지는 한번 시행되면 수준을 낮추기 어려운 하방 경직성을 갖고 있다. 적절히 쓰면 명약이 되지만, 과하면 마약처럼 심각한 금단현상을 부른다. 그리스가 밖을 향해서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이런 진단을 수용한다면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복지의 균형점을 재조정하고, 국민들도 허리띠 졸라매고 살 줄 아는 미래지향적 체제를 구축하는 계기로 만들 수 있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