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그리다’ 연필이 있었다… 임헌우 계명대 교수 ‘연필 예찬’
입력 2011-11-03 19:22
# 잘 알려진 것처럼 흑연과 다이아몬드는 오로지 탄소로만 구성된 물질이지만 분자 결정 구조의 차이에 따라 가격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흔해 빠진 검은 광물 덩어리와 눈부시게 반짝이는 보석 사이에 위치한 부등호의 방향은 자명하다. 하지만 흑연에 나뭇조각을 더한 연필과 다이아몬드를 비교한다면, 부등호 방향이 바뀔 수 있을까?
# 샤넬의 수석디자이너를 역임한 세계적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도널드 덕’을 탄생시킨 만화가 칼 바크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인 김훈. 국적도, 활동 분야도 다른 이들을 묶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연필. 이들은 연필을 사랑한 대표적 예술가다. 이들은 작업할 때 연필을 고집한다. 왜 그들은 조그마한 학용품을 사랑할까?
“연필로 쓰고 그리는 작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 중 가장 멋진 작업이 아닐까 합니다.” 여기 연필을 사랑하는 또 한 명의 디자이너가 있다. 계명대 시각디자인과 임헌우(44) 교수. 그는 연필을 소재로 한 일련의 디자인 일러스트 작품을 제작했고 이를 통해 올해 세계 3대 디자인상 중 하나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본상(Winner)을 받았다. 미국의 저명 디자인상인 ‘미국 그래픽디자인상(GD USA)’에서도 본상을 받았다. 그의 ‘연필론’을 통해 위 질문의 답을 찾아본다.
연필은 [ ]다
20세기 이전 사람들이 쓰거나 그리는데 ‘사용했던’ 도구, 집집마다 개인 컴퓨터(PC)가 1대 이상 있고 많은 이들이 손안의 컴퓨터인 스마트폰과 태블릿PC를 들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입력’ 할 수 있는 21세기에 심이 부러지고 검은 가루를 만들어내고 지우개가 필요한 연필은 시대착오적인 도구…, 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키보드로 입력하는 것이 정보를 구성하고 생성하는 작업이라면, 연필로 쓰고 그리는 것은 생각과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숙성시키고 표현해내는 일종의 고차원적 정신노동이다. 임 교수는 말한다. “연필은 ‘쓰기와 그리기’라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행동을 가장 특별한 행동으로 승화시켜줍니다.” 연필은 또 ‘입력’ 행위가 가질 수 없는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연필은 다이너마이트입니다.” 임 교수가 연필을 소재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연필에 숨어 있는 폭발력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아이디어는 연필 끝에서 출발한다. 마음속 헝클어진 아이디어와 희뿌연 상상력의 조각들은 뾰족한 연필 끝에서 예리하게 도려지고 현실화된다. 아이디어는 한번 종이에 펼쳐진 이후에야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듯 수만 갈래 새로운 아이디어로 진화할 수 있다. “예술도 예술가의 마음속 어떤 것이 폭발하면서 나오잖아요. 연필은 그 폭발을 일으키는 도구예요.”
연필은 목련이다. 긴 겨울을 보내고 난 뒤 마주하게 된 하얀 꽃잎이다. 긴긴 밤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워 겨우 완성한 편지는 키보드로 입력할 수 없고 문자 메시지로도 표현할 길 없는 기다림의 과정을 담고 있다. 손으로 쓴 편지는 받는 이의 심장에 꽂히는 감동이 되고 한없는 그리움이 된다.
또한 연필은 연탄이다. 자신을 태워 온기를 전하는 연탄처럼 기꺼이 자신을 소모해서 그리움의 언어가 되고 자신을 부정해서 새로운 그림으로 탄생한다.
연필은 필름 카메라다. 디지털 카메라는 즉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미지를 버튼 하나로 삭제할 수 있다.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일어나고 지나간다. 하지만 필름 카메라는 필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세심하게 준비하고 공들여 찍어야 한다. 사진이 인화될 때까지의 시간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속도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회. 연필은 느림의 미학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필름 카메라와 닮았다.
연필은 열쇠다. 세상 어려운 문제를 푸는 답이 연필 한 자루에 숨겨져 있다. 연필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거나 쓰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손으로 뭔가를 끼적이고 낙서하는 과정 속에 세상의 숨겨진 비밀이 풀렸고, 예술과 문명이 탄생했다. “요샌 연필 사용 횟수가 줄었잖아요. 그저 연필 사용 횟수만 준 게 아니라 생각하는 횟수가 준 것 같아요. 연필을 손가락 끝으로 돌려가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본 게 언제인가요?”
연필은 스티브 잡스를 만든 스승이기도 하다. 잡스는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애플=디자인 1인자’의 공식을 만들어준 애플 서체의 비밀을 공개했다. 그는 청년시절 리드칼리지 캠퍼스 곳곳에 붙은 포스터의 아름다운 서체에 반했고, 그곳에서 캘리그래피(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 관련 수업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글꼴과, 다른 글자의 조합 사이에 있는 공간의 다양한 변화는 과학적 방식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으로 오묘한 것이었습니다.” 캘리그래피는 손과 연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분야다. 연필이 없었다면 IT 아이콘도 없었다.
당신의 연필은 무엇인가?
연필은 [ ]보다 강하다
빨간 바탕에 흰색으로 그려진 여러 모양의 칼이 있다. 반대쪽엔 연필 한 자루가 외롭게, 하지만 꿋꿋하게 무기와 맞선다. 이 작품의 이름은 ‘연필은 칼보다 강하다’이다. 칼이 있던 자리에는 여러 자루의 총이, 여러 탱크와 전투기가, 각종 잠수함과 미사일이 들어서지만 연필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킨다. 금속 총알은 굴복을 요구하며 두려움만 준다. 그러나 연필 총알은 사람의 마음을 예리하게 뚫고 들어가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진짜 감동을 준다. 그래서 연필은 어떤 무기보다 강하다.
연필은 커다란 확성기, 방송용 카메라보다 강하다. 꾹꾹 눌러쓴 이의 진심이 담긴 메시지, 마음 속 심상이 오롯이 담긴 그림을 만들어 내는 연필은 허황된 정치적 선전, 꾸며진 거짓 이미지를 이긴다.
연필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스타워즈의 광선검, 월트디즈니의 미키마우스도 이긴다. 연필이 없었다면 이들 작품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플의 유명한 사과 로고와 아이폰도 연필을 통해 구체화됐다. 아름다움과 혁신의 근간에는 연필이 있었다. 그래서 연필이 더 강하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영어 학습 때 가장 일찍 접하게 되는 구문인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로 풀이된다. 그러나 연필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펜슬(pencil). 펜과 펜슬(연필), 그 차이는 뭘까?
펜과 달리 연필은 ‘깎는다’는 필수적인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1분 남짓의 짧은 시간, 조심하지 않으면 칼에 손이 베일 수도 있는 단순하면서도 정교한 작업은 연필이 인간에게 주는 고유한 선물이다. 우리는 뾰족하게 깎는 행동을 통해 생각을 날카롭게 벼리고 감각을 더 예리하게 다듬는다.
또한 펜과 달리 연필은 지우개라는 단짝 친구가 있다. 이미 완결된 스케치를 지워내는 것도 훌륭한 디자인, 창작 행위가 된다. “유선 전화기의 선을 지우면서 무선 전화기가 탄생했고, 수영복의 가운데 부분을 지우면서 비키니가 탄생했어요. 지우는 것도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지우개와 함께 있어야 아이디어, 상상력은 완벽함에 도달한다.
당신의 연필은 무엇보다 강한가?
연필에 경의를!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다이아몬드의 가격은 연필보다 비싸다. 그러나 다이아몬드가 과연 연필이 만들어내는 마술 같은 상상력과 수많은 아이디어보다, 연필에 담긴 어린 시절의 추억과 아련한 그리움보다, 쓰는 이의 정성과 노력보다 가치 있을까? 연필 끝에서 발휘되는 인간의 상상력과 예술, 문명의 가치에 다이아몬드가 감히 범접이나 할 수 있을까? 자녀에게 연필 한 자루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700만원짜리 2캐럿’ 다이아몬드를 물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지지 않을까?
‘연필 > 다이아몬드’라는 부등호로 결론을 내렸다면, 한 자루의 연필에 경의를 표해도 좋다. ‘디지털 혁명 속 아날로그의 반격’ ‘복고주의’ 등의 짧은 수사로는 연필과, 연필을 사용하는 행위에 담긴 무한한 의미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덧붙이자면 이 기사는 기자수첩의 여백, 순백의 종이 위에 심이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6B 연필로 초고를 쓴 뒤 컴퓨터 워드 프로그램으로 옮겨 출고한 것이다. 소설가 김훈의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 어렴풋이 이해됐다. 오랜만에 듣는, 연필이 글을 밀고 나가는 사각사각 소리,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손끝의 느낌이 무척 좋았다.
글=김도훈 기자,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kinch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