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갑의 먹줄꼭지] 낙선자 여러분께
입력 2011-11-03 18:13
지난 10월 26일의 재·보궐선거는 전국 42개 선거구에서 딱 42명을 당선시켰다. 자명한 일이다. 자명하지 않은 부분은 이번 선거에 입후보했던 총 162명 중 당선되지 못한 120명이다.
이번 선거에서 당선자를 결정하는 기본규칙은 ‘유효투표의 다수를 얻은 자’라는 것이다. 여기에 두어 가지 예외조항이 붙는다. 하나는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일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즉 타이브레이커(tie breaker)에 관한 규칙이고, 또 하나는 반대로 후보자가 한 사람 밖에 없을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한 규칙이다.
간단명료하게만 보이는 이 “유효투표의 다수를 얻은 자”라는 기본규칙 안에도 몇 가지 짚고 넘어 가야 할 것이 있다. 우선 ‘유효투표’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의 문제이다. 2004년 미국대통령 선거에서 사상초유의 헌정위기까지 우려하게 했던 사건의 핵심이 바로 이 부분이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선거권의 문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최근 연령제한의 문제를 빼면 우리나라에서 이 부분에 대한 큰 논란은 없었다. ‘다수’, 또는 ‘최다득표’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심심치 않게 등장했던 개표와 집표과정을 둘러싼 논란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전도 없고, 표 다발도 없어졌다. 집계결과가 나오면 후보자 모두 위에서 말했던 규칙을, 싫든 좋든 따른다. 보통 때는 잘 들을 수 없는 ‘겸허’라는 말이 발에 차일 정도로 굴러다닐 때가 이때다. 이번에도 선거가 끝난 날 120명이 그렇게 ‘겸허하게’ 선거결과를 받아들였다.
게임의 규칙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잘 안다. 때로는 그것 때문에 피까지 흘렸었다. 그럼에도 규칙이기 때문에 지킨다는 말은 맥이 빠진다. 그러면 규칙은 살아남겠지만 게임 자체는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규칙은 게임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수단이다. 물론 수단이 없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수단은 목적을 위해 있다.
그렇다면 선거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국민의 뜻을 듣고, 시민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선거과정을 통해 이 뜻과 마음이 표현되고, 또 그것이 실행에 옮겨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몇 가지 정해진 단계를 거쳐야 한다. 우선은 투표, 그리고 그 결과물 중 하나인 투표율의 문제가 있다. 아마도 가장 큰 관심을 받았을 서울시장 선거의 경우, 투표율은 48.6%였다.
유권자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가 자신의 뜻과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나머지 절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확실히 알 도리는 없다. 여론조사가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점점 그 결과를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워지는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투표에 참가한 절반과 그렇지 않은 절반이 대강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대담한’ 가정을 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자.
득표수를 집계해 후보자들이 각각 몇 표를 얻었는지가 발표된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는 박원순 후보가 유효투표의 53.40%인 215만8476표, 나경원 후보가 그보다 29만596표 적은 186만7880표(46.21%), 그리고 배일도 후보가 1만5048표(0.38%)를 각각 얻었다. 득표수에 따라 등수가 매겨지고, 1위인 최다수 득표자가 ‘당선자’가 됐다.
이 많은 숫자들은 다음 날 신문에 한번쯤 나타나고는 곧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남는 것은 딱 하나, 승자, 즉 당선자가 누구인지 뿐이다. 이처럼 선거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쟁을 하고, 그 결과는 ‘승(당선)’ 아니면 ‘패(낙선)’의 두 가지로만 나타난다. 29만 표 넘게 차이가 나도, 한 표 차이가 나도 결과는 같다.
국민의 뜻을 듣고 시민의 마음을 읽는다는 고상한 이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엄청나게 ‘폭력적인’ 방법이다. 이 ’폭력성’이 선거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지탱하는 근간이란 점은 거의 표면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치 경마하듯 승자가 누구인지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언론이나, 어떻게 하면 이길까 하는 ‘정치공학’에 빠져서 ‘한판승부’의 분위기에 들떠 있는 후보자와 정당의 모습은 정작 국민의 뜻을 듣고 시민의 마음을 읽는 일에서 많이 동떨어져 있는 듯 보인다. 수백만의 시민이 누구를 뽑을까 고민하고, 얼굴을 붉혀가며 토론하고, 바쁜 시간을 내어 투표장에 줄을 섰던 것이 모두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에서의 줄다리기처럼 다뤄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유권자 입장에서는 분하기까지 하다.
물론 이런 과정과 결과는 정해진, 그리고 합의된, 규칙을 따른다는 면에서 ‘정당성’을, 승패를 명확히 구분해 낸다는 면에서 ‘효율성’을 지닌다. 과정과 결과의 정당성이고 효율성이다. 둘 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 선거를 끝낸 지도 일주일을 넘긴 만큼, 머리를 식히고 선거라는 제도의 본래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그 본래의 의미로 돌아간다면 진 사람보다 더 겸허하게 선거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사람은 이긴 사람이다. 자신에게 표를 준 사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도, 자신에게 표를 주지 않은 사람의 뜻과 마음도 이젠 읽어야 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절반에 못 미치는 투표율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진 사람도 물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이젠 손을 털고, 당분간 일을 접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표를 주었던 사람의 뜻과 마음을 대의(代議)과정에 반영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표들이 두 번 죽지 않도록 선거운동 할 때만큼 열심히 뛰어다녀야 한다. 거기서는 겸허해지면 안 된다.
입후보를 일회성, 일과성 이벤트 정도로 생각하거나, 이기면 좋고, 지면 말고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그들이 정치를 식상하게 만드는 주범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