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의 문화 게릴라] 숫자는 폭력이다
입력 2011-11-03 18:11
때때로 숫자는 폭력이다. 남자 32세, 여자 29세라고 발표된, 2011년의 대한민국 결혼 평균 연령은 그 나이를 넘어선 노처녀와 노총각들에겐 심리적 불안을 일으키게 하는 사회적 압력이다. 4인 기준 월평균 수입 얼마라는 신문기사는 제시된 커트라인을 통과하지 못한 가장들에겐 무능함과 ‘루저’의 조롱을 담은 무차별한 린치다.
21세기의 모든 것은 숫자로 표시된다. 인간의 행복마저도 연봉 얼마, 자동차 배기량 몇 cc, 아파트 평수 몇 평이라는 숫자로 이야기된다. 재미있는 방송이란 시청률 몇 %로, 사회적 가치가 있는 이슈는 트위터의 리트윗 숫자로 평가된다. 숫자로 치환되지 못할 가치는 없다. 아니 적어도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시대는 그렇게 믿고 있는 듯 보인다.
대중문화는 그 한 복판에서 유린당하고 있다. 100만 다운로드와 1000만 관객은 음원과 영화의 절대적 가치 평가가 되었다. ‘명품’과 ‘그 이외의 것’을 나누는 기준점이 된 것이다. 예전 문화부 장관은 이 기준을 너무도 신뢰한 나머지 독립 영화조차도 ‘예상 관객 숫자’를 기준으로 지원하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독립 영화라는 장르가 가진 풍부한 의미는 사라진 채, ‘영화=관객수’라는 단순한 공식만이 머릿속에 떠오른 결과일 것이다. 대중들의 순수한 관심을 나타냈던 유튜브(미국 동영상 전문 사이트)의 조회수와 아고라(포털사이트 다음 토론광장)의 댓글 수가 대중문화의 틀 안으로 이식되면서 숫자는 유일무이한 가치 척도가 되었다.
숫자로 기록된 문화는 그 숫자의 총합에 따라 서열이 나뉜다. 방송가에 몰아친 오디션과 서바이벌 열풍은 서열의 공식화를 선언했다. 현장 평가단, 인터넷과 휴대폰 실시간 투표 참여를 통해 숫자가 모여든다. 그리고 그 모든 숫자의 덧셈을 통해 1등부터 꼴등까지의 순서가 매겨진다. 이제 숫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등은 가치 있는 것이며, 꼴등은 의미 없는 것이란 이데올로기를 퍼트린다. 이 지점에서 예술의 고전적 가치는 부정된다. 미적 가치란 오직 그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지, 등수를 매기는 경쟁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가 스포츠가 되어버린 지점에서 예술은 점점 사라져간다.
이런 대중문화, 예술의 수치화는 정치·사회적 가치관에서 영향을 받았다. G20에 소속된 것에, 선진 20개국 중 하나의 국가가 된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껴야만 한다고 ‘국가’는 강요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G20의 국가가 어떻게 선정(!)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단지 중요한 것은 선택된 국가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20이라는 숫자가 전 세계의 국가 수에 비해 아주 작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자랑스러워야만 한다!? 한 해의 수출 흑자와 해외 공사 수주량은 단순한 경제성과를 넘어서 우리에게 ‘이 정도면 당신은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무조건 행복해야만 합니다’라는 이상한 슬로건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사람들에게 진짜 행복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겠다는 배려는 담겨있지 않다. 이것은 마치 이 음악은 100만 다운로드의 음원이니 듣는 순간 ‘너희들은 무조건 즐거워야만 해!’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정치, 사회가 길을 잃은 곳에서 대중문화도 똑같이 길을 잃었다. 선진국이 되면 무조건 행복해질 것이라고 부르짖는 정치인들의 나라에서 대한민국의 문화는 당분간 ‘힘들어’ 보인다.
필자는… 팝 칼럼니스트, MBC ‘나는 가수다’, 자문위원 MBC ‘섹션TV 연예통신’ 게스트, SBS러브FM ‘잠 못드는 밤 김태훈입니다’ 진행, KBS 2FM ‘봄여름가을겨울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고정 게스트, 저서 ‘내일도 나를 사랑할 건가요?’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