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9) 사병순·김영훈 목사의 사역 후반기
입력 2011-11-03 17:41
남편은 미국에서, 부인은 조선에서 독립운동 투혼
취재팀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를 거쳐 남동쪽으로 차를 타고 310㎞ 떨어져 있는 프레즈노카운티의 다뉴바와 리들리로 갔다.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장 후보까지 됐던 김영훈 목사와 달리 비교적 소박하게 미국에서 활동했던 사병순 목사의 행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사전에 입수한 1918년 9월 5일자 신한민보에 따르면 사 목사는 김 목사와 함께 새크라멘토에서 남쪽으로 100㎞ 떨어져 있는 맨티카교회 건축을 위해 각각 5원씩 헌금했다. 그해 10월 24일자 신한민보는 그가 다뉴바 지방회 학무원으로 활동했다는 걸 알려준다. “다뉴바 지방의 한국어학교(1반 6명, 2반 4명, 3반 3명 총 13명)에서 ‘대한역사’라는 과목을 가르쳤다.”
독립운동 터전인 다뉴바한인교회 담임 사병순 목사
먼저 사 목사가 주로 활동했던 다뉴바로 향했다. 그가 담임했던 다뉴바한인교회를 마침내 찾아냈다. 웨스트 O(오) 스트리트와 알타 에비 교차로였다. 하지만 더 이상 교회가 아니었다. 다뉴바 경찰국이 들어서 있었다. 교회 옛터 앞에는 기념비가 있었다. 선조들의 독립운동 역사를 보존하려는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노력의 결실이었다. 기념비에는 ‘이민 선조들의 믿음, 고난과 겨레 사랑을 기념하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왔던 한인 노동자와 본국에서 온 정치 망명 인사 유학생들이 농장 일자리를 찾아 1909년부터 이곳 다뉴바시로 이주해오기 시작하였다. 여름 수확기엔 한인인구가 350여명을 넘었다. 1912년 10월 15일에 이 이민 선조들이 바로 이곳 204 웨스트 O 스트리트에 처음으로 장로교 한인교회를 세웠다….” 비에는 1919년 3·1 독립운동 1주기를 맞아 다뉴바한인장로교회에서 열린 기념식 장면과 1940년대 다뉴바한인장로교회 성도들 모습, 다뉴바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의 사진도 새겨져 있었다. 고국의 독립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선조들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다뉴바시의 메인스트리트인 L(엘) 스트리트로 갔다. 1920년부터 매년 3·1절 기념행사가 열렸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와 우남 이승만도 이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연설했다. 3·1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한인 여성들은 다뉴바한인장로교회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을 출범시켰다. 취재팀은 대한여자애국단이 1920년 3·1절 기념 시가행진에 앞서 촬영한 사진을 L스트리트 한켠에 있는 기념비에서 찾아냈다.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가 시가행진이 펼쳐진 그 장소에 비를 세워놓은 것이다. 여성들은 마치 나이팅케일을 연상시키는 복장으로 순결한 한민족의 고고한 기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어렵게 일하던 농장 노동자들을 독려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일본산 간장 안 먹기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사 목사의 활동 기록은 1921년 2월 17일자 신한민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다뉴바 국민회 창립 12주년 기념식에서 대표기도를 했다. 그해 2월 27일에는 국민회 다뉴바 지방회에, 3월 1일에는 독립 만세운동 경축 행사에 참석했다. 1921년 3월 1일 새벽 5시30분 ‘새벽광복기도회’에서 사회를 본 데 이어 오전 9시 경축회에서 대표기도를 인도하기도 했다.
또 다른 독립운동 기지인 리들리로 발길을 돌렸다. 다뉴바로부터 11㎞ 정도 거리였다. 리들리는 이승만 안창호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머문 버거스호텔이 있는 곳이다. 이밖에 리들리한인장로교회, 한인공동묘지 등이 있다. 취재팀이 리들리한인교회를 찾았지만 사 목사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J(제이) 스트리트에 있는 리들리한인장로교회도 더 이상 한인교회가 아니었다. 오순절 계통 미국인교회로 변해 있었다. 리들리에는 현재 안창호 이승만 등 애국 지사 10명을 기념하는 비와 함께 독립문이 세워져 있다. 지난해 10월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의 노력으로 건립된 독립문은 높이 4.2m로 실제 독립문 원형의 4분의 1 크기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사병순 목사 부부
사 목사에게 예상치 못한 고통이 찾아왔다.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던 부인 송수은 사모가 1921년 일경에 체포된 것. 송 사모는 1919년 3·1 만세운동 후 ‘반석대한애국부인청년단’에 가입했다가 군자금 모집과 배일사상의 선전 및 불온문서의 배포 혐의로 체포됐다. 송 사모의 징역형 선고 소식은 1921년 11월 10일자 신한민보에 게재됐다. 여성으로서 독립자금을 거둬 임시정부에 보내는 일에 깊이 관여했던 것. 송 사모는 일경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다. 송 사모가 감옥생활을 하던 시절 사 목사는 마국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애썼다. 1921년 6월 다뉴바 교민들에게 구미위원부 경비를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해 8월 5일 대한여자애국단 다뉴바 지부 창립 기념식에 참석, 대표 기도를 맡았다. 아마 그때 고국에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서 눈물의 애국가를 불렀을 것이다.
사 목사는 다음해 갑작스럽게 다뉴바한인장로교회 목사직을 내려놓았다. 그해 출옥한 송 사모는 고문의 후유증 탓인지 세상을 떠났다. 그때 사 목사와 송 사모 사이에는 9살 된 어린 딸 사인애(史仁愛)가 있었다. 사 목사는 고국의 고아원에 후원금을 보내는가 하면 한인의 장례 및 하관식 예배를 주관하며 1924년까지 다뉴바에서 활동했다. 1924년 로스앤젤레스 3·1절 행사를 끝으로 그의 미국 행적을 찾을 길이 없다. 그는 1930년대 잠시 중국에 나타났다. 1935년 8월 톈진(天津)에 머물던 사 목사가 교역자 공석인 톈진한인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던 것. 관련 소식은 1937년 1월 19일자 기독신보에 나와 있다. “주야로 열심히 전도하던 김성수씨는 임기가 돼 귀국해 (현지에) 머물던 전 조선장로회 목사 사병순씨가 예배를 인도하시며 수고하였다.” 사 목사는 1944년 8월 9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월하리에서 67세의 나이에 소천했다. 이와 관련, 사 목사의 외손자 김희준 권사가 이런 말을 남겼다. “외조부(사병순 목사)는 사망 1개월 전 강원도 금화경찰서 고등경찰계에서 혹독한 고문조사를 받으신 뒤 풀려났어요.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때가 저와의 첫 대면이었습니다.” 사 목사가 소천 전까지 독립운동에 관여했음을 알려주는 증언이다.
안타까운 말로를 맞이한 김영훈 목사
고국으로 돌아온 김영훈 목사는 고향인 평북 의주 의산노회에서 활동했다. 당시 의산노회장은 N C 휘트모어(魏大模) 선교사였다. 의산노회는 교인들로부터 불신임을 받은 의주읍 서교회 김창건 목사 대신 김영훈 목사를 임시목사로 파송했다. 김 목사는 1923년 2월 27일 의산노회를 통해 정식으로 서교회 담임목사가 됐다. 1년 뒤 그는 의산노회장이 됐고 1925년에는 의주 최초의 사립학교인 양실학교장이 돼 인재양성에도 앞장섰다. 김 목사는 1927년 9월 9일 원산부 광석동예배당에서 열린 제16회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됐다. 그는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청산유아원장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1932년 2월 그는 웬일인지 서교회 목사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은 실로 경악스럽다. “사경회 기간 중, 어느 날 저녁 대접을 받으러 가는 길에 우리나라 장로교회 총회에서 제1대 선교사로 산둥에 파송됐던 김영훈씨를 만났던 일이 있다. 그날 그는 술에 만취돼 지나가고 있었는데 최득의 목사님이 그를 지목하며 저이가 김영훈씨인데 저렇게 타락됐다고 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고 떨리는 마음을 가졌다….” 이는 의산노회 겨울 사경회 강사였던 김경하 목사의 회고이다.
김 목사가 무엇 때문에 술에 취해 길을 걷고 있었을까. 우리나라 1대 산둥성 선교사, 미주 독립운동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등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매우 안타까운 말로를 맞았다. 그가 1939년 소천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그만큼 그는 한국교계에서 잊혀진 인물이 된 것이다.
다뉴바·리들리=글·사진 함태경 기자, 김교철 목사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