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호경] ‘1억원 피부숍’ 왜 문제인가
입력 2011-11-02 17:50
지난 서울시장 선거 과정에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의 ‘1억원짜리 피부 클리닉’ 설이 확산돼 상당한 파장이 있었다. 나 후보 측은 “전체 치료액은 (1억원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금액”이라고 펄쩍 뛰었지만, 어쨌든 그 건은 표심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기자의 한 후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런 말을 했다. “나 후보가 실제로 1억원을 썼다고 하더라도, 그런 게 왜 문제가 되죠? 자기 돈 갖고 자기가 쓰는 건데.” 후배의 말이 일리가 없진 않지만, 다수 여론이 술렁이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단 1억원 피부 클리닉(나 후보가 실제로 그런 비용을 지불했는지와는 상관없이) 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심심치 않게 소개되는 일부 부유층의 놀라울 만한 과소비 사례들은 왜 사회적 문제가 될까.
그 후배에게 해줄 대답을 궁리하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문열의 초기작 ‘사람의 아들’ 도입부에는 주요 등장인물 조동팔이 지나가던 젊은 여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온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경찰이 왜 모르는 여자 엉덩이를 찼느냐고 추궁하자 조동팔은 이렇게 답한다. “가죽 장화가 너무 길어서…. 그 한 켤레면 몇 사람의 언 발을 녹일 수가 있지. 바로 저 여자가 지나가던 길옆에도, 맨발에 고무신만 신은 아이가 떨며 엎드려 구걸을 하고 있었소….”
한 사람의 풍요가 꼭 다른 사람의 숨은 희생을 밟고 누리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용자원과 재화가 한정된 국민경제에서 누군가의 과도한 소비가 다른 누군가의 결핍을 야기할 가능성은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 이건 일종의 ‘나비 효과’일 수도 있다. 실제로 넘치는 풍요를 구가하는 어떤 계층의 반대편에는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지 못해 생사의 기로에 선 이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그런 상황에서 재력이 넉넉한 사람들이 재화의 본래 효용을 훨씬 뛰어넘는 금전을 지출하며 절제 없는 풍요를 즐길 경우,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박탈감을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다.
사람들(빈곤층뿐만 아니라 중산층도)은 자신의 부의 절대적 수준이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행복은커녕 불행을 느끼게 된다(경제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고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렌은 ‘비싼 것이 아름답다’는 식의 유한계급 행태를 ‘과시적 소비’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그런 행태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신뢰, 연대, 공동체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탐욕과 과소비가 자제돼야 할 중요한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돈 내가 쓴다’는 자기만족에만 열중하면 그 기반이 되는 자본주의와 시장주의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미국 뉴욕의 월가에서 시작돼 전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1%를 향한 99%의 분노’ 시위도 이와 무관치 않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의 정신적 근간을 탐구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물을 가득 짊어지고서 무덤으로 가는 것을 자신이 살아가는 목적으로 삼는 것은 저주받은 금전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이 원하는 대로 목적에 적합하고 모두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재산을 사용하기보다 과시적 형태의 사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비합리적으로 재산을 사용하는 것이다.”
‘1억원짜리 피부 클리닉’ 같은 사례가 개인의 일을 넘어 왜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는지 후배의 의문을 풀어주고 싶었는데, 이 칼럼이 답이 됐는지 모르겠다.
김호경 특집기획부 차장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