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일수] 폴리페서, 어떻게 볼 것인가

입력 2011-11-02 17:46


최근 신폴리페서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로 해묵은 폴리페서 논쟁이 뜨겁다. 종전에 폴리페서란 정치인들의 정책참모 역할을 하다가 그 정치인이 권력을 잡게 되면 대학을 떠나 정계나 관계에 일시 몸을 담았다가 다시 대학으로 복귀하는 일단의 정치성향 학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대선의 해가 가까워지면서 다시 폴리페서의 계절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전후해 등장한 신폴리페서 논쟁에는 주로 서울대 안철수, 조국, 박세일 교수의 행태가 대상이다. 과거 폴리페서들이 유력 정치인의 조력자 내지 조연에 불과했던 데 비해 이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들의 동반자 내지 주연급 정치인 행세를 하고 나선다는 데서 새로운 양태를 띤다는 것이다. 3김시대 정치9단들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지녔다고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역량보다 정보화 사회의 새로운 소통 구조와 매개 수단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20만명 이상의 팔로어를 거느리는 트위터 고수들의 여론몰이 기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사회현상이다.

대선 앞두고 새로운 세력 등장

학문적 경계를 뛰어넘는 통섭과 융합의 시대에 교수라고 상아탑 안에서 머물러 있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직역에 굴레 씌워진 금기와 관습, 의례들은 오늘날과 같이 개성과 탤런트가 중시되는 현실에서 재평가되고 재음미되어야 할 그 무엇이기도 하다. 문제는 교수의 정치참여라는 불가피한 현실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과 자기 절제의 정도는 항상 과제로 남는다는 점이다. 교수도 대학이라는 특수사회의 한 구성원인 만큼 결코 파편화된 개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교수는 모두 상아탑을 떠나야 한다는 논지는 오늘의 현실에 맞지 않아 보인다. 교수는 대학사회의 규범 틀 안에서 얼마든지 정치를 비판하고 인식적으로 참여하며 정치를 더욱 높은 보편성의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교수가 정치에 몰입하여 정치인과의 경계조차 식별하기 힘든 지경까지 이른다면 그것은 분명 자기 본령을 벗어난 일탈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본분을 넘어서서 자기 정체성이 불분명한 교수들이 대학사회를 주름잡고 다닌다면 그가 속한 대학, 학문공동체의 숲은 속으로부터 시들어가기 십상이다.

대학의 정신은 진리 탐구와 보편적 가치의 추구에 있다. 이 같은 정신은 파우스트적 열정으로도 채워지기 힘든 높은 지평과 맞닿아 있다. 세계의 우수 대학인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촌음을 아껴가며 연구와 교수에 몰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유망한 젊은 대학인들이 이에서 벗어나 곁눈팔기에 정력을 쏟는다면 이 나라 대학의 장래가 어떻게 될까?

학자라면 촌음 아껴 연구해야

정치인은 바른 정치를 위해 더욱 정치인다워져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학교수도 학문공동체 발전을 위해 더욱 교수다워져야 한다. 우리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한 길을 일관되게 걸어가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희귀한 세태를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도덕적 자아 개발에 진력하며 연구와 교수에 몰입해 있는 순전한 대학인들에게 우리는 신뢰와 존경을 보내 드려야 옳다. 정치판에 끼어서 학자적 소명의 삶을 제쳐두고 세월을 낭비하는 사이비 대학인들을 오히려 경멸해야 한다. 학문과 진리의 세계는 한나절 품값으로 때울 만큼 그렇게 녹녹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시비와 논쟁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스스로 대학을 떠나 정치에 몰입하는 것이 상책이다. 오늘의 신폴리페서 현상을 대하면서 우리나라 대학의 정신적 후진성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