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그리운 탐라의 어머니 ‘제주 오름’
입력 2011-11-02 17:54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빛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루게릭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년 동안 제주도의 초원과 오름을 카메라에 담았던 사진작가 김영갑은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황홀한 그 무엇이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 존재한다고 고백했다. 김영갑이 죽는 날까지 중산간을 떠나지못하게 했던 존재는 바로 오름이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섬처럼 흩뿌려져 있는 368개의 오름은 화산활동으로 태어난 기생화산으로 생명탄생의 공간이다. 마소가 오름에서 태어나고 사람이 오름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봄에는 형형색색의 앙증맞은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하얀 억새꽃이 장관을 이루는 오름은 그래서 제주도의 모든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시간마저 멈춰버린 원시의 오름은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화다. 계절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순식간에 모습을 달리하면서 삽시간의 황홀을 연출한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러운 능선과 분화구에 빛과 그림자가 생겨나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 꿈틀댄다.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해발 334.5m의 군산오름은 제주도 서남부를 대표하는 오름으로 생김새가 군막(軍幕)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덕계곡과 대평마을을 이어주는 진입로에 뉴제주펜션 방면으로 가느다란 찻길이 있어 정상 아래 쉼터까지 자동차로 오를 수 있다.
군산오름은 일출과 일몰 명소로 정상에서의 조망이 시원하다. 주차공간을 겸한 쉼터에서 정상까지는 5분 남짓한 거리로 계단과 나무터널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 서면 한라산은 물론 송악산, 산방산, 형제섬, 가파도, 마라도를 비롯해 중문관광단지 등 바다와 벗한 남제주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월 대보름 들불축제로 유명한 애월읍 봉성리의 새별오름은 높이 119m의 원추형. 동쪽 산등성이는 나무 한그루 없는 민둥산으로 억새가 무성하지만 서쪽은 가파르고 잡목이 많다. 괴오름 이달봉, 금오름, 덩오름 등 봉긋봉긋 솟은 서부지역의 오름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정상에 오르면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조망이 시원하다. 고려 공민왕 때 최영 장군이 이 오름에 진영을 구축하고 목호의 난을 평정했다고 전해진다.
제주도의 수많은 오름 중 애월읍 유수암리의 노꼬메오름만큼 특이한 오름도 드물다. 제주시에서 서귀포 방향으로 서부관광도로를 달리다 보면 왼편으로 시선을 끄는 웅장한 오름이 보인다. 뾰족한 봉우리를 연결하는 능선의 모양이나 한쪽으로 툭 터져 나온 듯한 굼부리의 형세가 인상적인 오름으로 오른쪽의 큰 오름을 노꼬메, 왼쪽의 작은 오름은 족은노꼬메로 불린다.
주차장에서 마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목장을 10분쯤 가로지르면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한 노꼬메오름 등산로가 나온다. 등산로는 햇빛 한 점 스며들지 않지 않을 정도로 울창해 밀림을 방불케 한다. 정상까지 2.3㎞로, 비교적 완만한 등산로는 정상을 1㎞ 앞두고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울창한 숲을 벗어나 능선을 타는 순간 시야가 확 트이면서 한라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노꼬메오름의 정상은 한라산에서 하산하는 단풍과 제주 시가지, 그리고 한라산 북서쪽의 오름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명소로 정상 주변은 억새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제주의 동부를 대표하는 오름은 능선의 곡선이 아름다운 용눈이오름과 ‘오름의 여왕’으로 불리는 따라비오름, 그리고 분화구 깊이가 백록담과 비슷한 다랑쉬오름이다. 이 아름다운 오름군을 한눈에 보려면 일대에서 가장 높은 높은오름(405.3m)에 올라야 한다.
송당리에서 동남쪽으로 1.5㎞ 지점에 위치한 높은오름은 능선미가 단아하고 유려한데다 구좌읍 중앙에 위치해 뭇 오름을 압도한다. 인근 다랑쉬오름과 함께 행글라이딩과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입구까지 늘어선 삼나무터널은 드라이브를 즐기기에도 좋다.
여느 오름과 달리 높은오름은 구좌읍 공설묘지를 관통해 올라야 하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지만 가파른 숲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갑자기 사방이 확 트이면서 중산간 초원 위로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과 따라비오름 등 수십 개의 오름이 섬처럼 불쑥불쑥 솟은 풍경이 황홀경을 연출한다. 오름군 뒤로는 멀리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아스라하게 보인다. 공동묘지 입구에서 정상까지는 약 20분.
군데군데 국수나무 찔레나무 쥐똥나무 청미래덩굴 등 키 작은 관목이 군락을 이룬 능선을 올라 정상에 서면 억새가 제주도의 거센 바람과 함께 쉼 없이 춤을 추고 보랏빛 야생화들은 그 사이에서 수줍은 듯 납작 엎드려 있다. 고개를 돌리면 영화 ‘이재수의 난’ 촬영지인 아부오름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된 거문오름 너머로 한라산이 구름 속에서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순간 높은오름 분화구에서 솟아났는지 구름 속에서 내려왔는지 패러글라이더 한 대가 불쑥 나타나 높은오름 상공을 몇 차례 순회하더니 다랑쉬오름으로 하늘여행을 떠난다. 시간마저 멈춰버린 원시의 오름에서 삽시간의 황홀이 연출되는 순간이다.
제주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