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십니까?] 이경숙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정치는 학문으로만 좋아합니다”

입력 2011-11-02 18:42


그는 대학사회가 ‘지성과 학문’이란 틀에 얽매여 있을 때 그 틀을 과감히 깨고 ‘경영개념’을 도입한 ‘CEO형 총장’이었다. 총장 재임 중 학교발전기금 1000억원을 모아 대학 부지를 배로 넓히고 건물 20여동을 새로 지으면서 ‘토목건축 총장’으로도 불렸다.

또 개성이 강한 대학교수 사회에서 4번씩이나 총장으로 추대된 그는 리더십개발원, 취업경력개발원, TESOL대학원, 음악치료대학원, 여성인적자원개발대학원 등 국내 최초 또는 세계 최초를 만들었다. 그쯤 되자 사람들은 그의 리더십을 배우고 싶어 했다.

“가장 큰 영향력은 섬김과 헌신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자신과 같이 존중하고,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할 때 사람들은 마음을 열어 자발적으로 협력합니다. 이런 섬김과 헌신의 문화는 개인과 조직의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영향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봉사자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2009년부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경숙(68·소망교회 권사) 전 숙명여대 총장을 만나 ‘부드러운 힘으로 세상을 바꾼 이야기’를 들어봤다.

광야의 초대장

1994년 3월 31일. 총장 취임식 후 책상 위에 놓인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7억8000만원짜리 세금고지서가 들어 있었다. 마치 ‘광야의 초대장’ 같았다. 당시 서울 청파동 캠퍼스 부지는 국·시유지로 편입돼 7개 정부기관이 소유권을 갖고 있었다. 학교 건물은 불법 건물이 됐다. 며칠 뒤엔 연체료, 범칙금 등이 날아들었다. 부임 후 가장 큰 어려움은 공원용지를 해제하고 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숙대가 효창공원 옆에 있잖아요. 학교 부지들이 공원용지에 묶여 있었어요. 공원용지를 해제하고 그 땅을 다시 사는 과정은 저에게 광야의 시간이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 없었어요.”

토지소유권 정리와 공원용지 해제를 위해 시의원 구의원 등 수백 명의 관계자들을 일일이 만나서 미래 여성교육발전을 위해 공원용지 해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한겨울 북한산에도 올랐고, 의원들이 참석하는 회의장까지 찾아가 회의가 끝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학교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의 설득커뮤니케이션은 차츰 받아들여졌다.

“새벽예배를 통해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긴장되고 떨릴 때마다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한 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결국 98년 모든 등기를 합법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이 새겨진 교문

그가 취임 후 가장 먼저 설치한 구조물이 교문이었다. 60년 전 세워진 교문은 낡고 초라했다. 3개의 벽돌교문은 형태도 제각각이었고 오랜 세월을 거치며 금이 가고 군데군데 허물어지기까지 했다. 교문 설치비용으로 3억원이 필요했다.

이 문제를 놓고 새벽예배에서 기도하던 중 한 독지가로부터 교문 설치비용을 기부 받았다. 조건은 교문에 성경 구절을 새겨 넣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기독교 대학이 아닌 일반 대학 교문에 성경 구절을 새겨 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우선 4개의 성경구절을 교무회의에 회람시키고 찬반토론을 벌였다. 또 2주에 걸쳐 학생회와 동창회 등의 의견도 수렴했다. 그 결과 모든 것을 총장에게 일임한다는 결정을 얻어냈다.

“4개의 성경구절은 여호수아 1:9,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히브리서 11:1∼2, 이사야 60:1입니다. 공원용지 해제를 위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 전 늘 묵상했던 말씀들입니다. 평생 가슴에 새기며 묵상한 성경구절이 새겨진 교문이 공개되던 날 교직원들과 서로 얼싸 안고 기쁨을 나눈 일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2006개의 도시락

개인의 꿈을 조직차원에서 구체화시킨 것이 비전이다. 이 비전은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활력을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는 세계적인 여성인재를 키워낸다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해 구성원들의 의지를 하나로 모았다. 95년부터 설립 100주년이 되는 2006년까지 12년에 걸친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니 필요한 돈이 1000억원이었습니다. 꿈과 비전과 목표가 분명해지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동문들을 대상으로 등록금 한 번 더 내기 운동을 벌이고, ‘제2창학선언 발기인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발기인대회 초청인원은 창학100주년이 되는 2006년에 맞춰 ‘2006명’으로 정했다. 모험이었다. 소수외부인사를 제외한 초청인사가 가정주부가 된 동문들이었다. 그러나 미래는 꿈꾸는 자의 것이란 확신을 갖고 국내 12개 신문에 5단 광고로 모임을 알렸다. “총장님 도시락 몇 개 준비할까요?” “2006명을 초대했으니 2006개를 준비 하세요” 실무자들은 타 대학이 비슷한 행사를 했는데 참석자가 1000명이 넘지 못했다며 걱정했다.

그러나 95년 2월 22일. 현장을 찾은 사람들의 수는 2500명이 넘었다. 모금은 62억원이었다.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 기적의 날이었다. 그는 2006년까지 숙대가 세계 최상의 명문여대가 되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여기에 필요한 1000억원의 발전기금을 모금하겠다고 공헌했다.

꿈을 팝니다.

학교발전기금 모금을 위해 그는 꿈을 팔았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2020년까지 대한민국 리더의 10%를 책임진다는 꿈과 비전을 들려주었다. 함께 시작하면 현실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학교의 모든 정책은 매주 3회 열리는 처장회의와 매주 1회 개최되는 교무위원회에서 열띤 논쟁을 통해 결정됐다. 그 결과는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됐다. 학교 예산 및 지출도 홈페이지에 공고됐다.

-학교발전기금 1000억원 모금은 달성하셨나요.

“2008년 14년간 수행해온 총장을 퇴임할 때 보니 1570억원의 현금과 신축한 21개의 건물, 매입한 17개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목표 금액보다 몇 배는 되겠지요. 그러나 저는 결코 제가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도우심 없으면 불가능했지요.

-성공적인 모금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나요.

“저는 꿈을 팔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공동체를 향한 꿈을 갖고 있습니다.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꿈을 이야기하면 마음이 움직입니다. 마음의 감동이 올 때 소중한 재산을 내놓잖아요. 전 그 꿈을 팔았고 그분들은 소중한 꿈을 샀다고 봅니다. 특히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숙명여대에 100억원을 지원해 줄 때도 돈 달라고 얘기하지 않았거든요. 여성인재 양성을 위한 대화를 나누며 공감대가 형성되자 발전기금을 지원하게 된 것이지요.”

춤추는 총장

그는 2001년부터 성년식과 함께하는 ‘청파 은혜제’에서 춤을 췄다. ‘춤추는 총장’이란 별명도 그래서 붙여졌다. 대학사회에서 총장으로 너무 가벼운 처신이 아니냐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 반응은 달랐다. “춤추는 총장님을 보니까 언니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렵게 느껴졌던 총장님이 갑자기 가깝게 느껴져요.” 2007년엔 응원단장 복장으로 깜짝 댄스를 선보여 학생들을 즐겁게 했다.

“매년 5월이 오면 학생들에게 선 보일 춤을 연습하는데 그럴 때마다 마냥 행복 했어요. 춤을 추다보면 마치 학생들과 함께 이십대가 된 느낌이 들거든요.”

-4번씩이나 총장으로 추대된 비결은 무엇인가요.

“제가 내 세운 비전에 구성원들이 공감했다고 봅니다. 우린 같은 꿈을 꾸었지요. 제 꿈이 아니라 학교 구성원 개개인의 꿈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 학생들이 모여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대한민국 리더의 10%안에 들어서 2020년 5월 22일(창립기념일) 시청 앞 서울광장에 모여 단합대회를 하자고요. 꼭 그렇게 되리라 믿어요.”

-대학생시절부터 포함해 47년 간 몸담아온 학교를 떠날 때 심정은 어떠하셨나요.

“학교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어요. 총장이란 자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준 기업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하는데 꾀를 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열과 성을 다했어요. 공원부지 해결을 위해 뛰어다니다 과로로 쓰러져 응급실에 몇 차례 실려 갈 정도로 진이 빠지도록 일했어요. 달려 갈 길을 열심히 달려갔기에 아쉬움은 없었고 하나님이 새롭게 주시는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비전을 찾아서

“요즘 학생들이 등록금과 취업문제로 고민하는 것 보면 교육자 입장에서 너무 가슴 아파요. 문제들이 다 해결이 돼서 걱정 안하고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장학재단이 학생들의 친구가 되길 바랍니다.”

그는 2009년 5월 한국장학재단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한국장학재단은 능력과 의지만 있으면 누구든지 공부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정부의 국정운영에 따라 2009년 5월 설립된 곳이다.

“저희 재단은 매학기 40만명의 학생들에게 3조원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연 25만명에게 5400억원의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학자금 지원 외에도 인재육성을 위해 사회 각계 CEO들이 학생들을 멘토링하며 봉사정신과 섬기는 리더십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청년백수 시대, 대학은 어떤 인재를 길러야 하는가요.

“대학에서 전문성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학생들은 대학에서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정체성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확실히 서지 않으면 남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봉사와 섬김의 리더십

그는 한국장학재단의 핵심경영 가치를 ‘봉사와 섬김의 리더십’에 두었다. 겸손하게 섬기는 공공기관을 만들겠다는 비전을 품고 있다.

“직원들 사이에 토론문화가 형성돼 있어 자발적인 제도개선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등록금 마감일이 지난 다음에야 장학금이 지급돼 학생들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제도개선을 시켰습니다. 또 대출자격을 알아보는 소득분위 파악 시간을 3일로 단축했고, 전산망을 통해 학생들이 제출할 서류를 간소화시켰습니다. 기관이 조금 고생하면 학생들의 시간과 경비를 줄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올 봄부터 한달에 한번 직원들을 대상으로 독서를 통해 자녀들의 인성교육을 시키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사장과 직원들이 만날 수 있는 티타임 ‘한 마음 차 한 잔’을 통해 직원들의 고충을 듣고 자녀교육에 대한 충고도 해준다.

-글로벌시대에 여성리더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요.

“여성들은 가정에서부터 가족을 잘 섬깁니다. 여성들이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문화를 사회에 확산시켰으면 좋겠어요. 21세기엔 권위적인 리더십이 아닌 소통과 따뜻함, 배려와 존중이 있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여성들은 그런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그런 문화를 주도해가길 바랍니다.”

-첫 대통령직 여성인수위원장이셨습니다. 정치무대에 다시 오를 생각은 없으신지요.

“어린시절 역사책을 많이 읽어 역사 시험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역사를 좋아했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어요. 정치는 학문으로만 좋아합니다. 부모님은 어린시절부터 제게 국가관을 심어주셨어요. 미국유학 갈 때도 태극기를 선물로 주시며 ‘네가 왜 유학을 가서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라’고 하셨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듯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일은 학교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었죠. 그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

그의 리더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앙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불가능한 일에도 도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미국 유학시절 크리스천이 된 그는 평범한 신자였다. 그의 변화는 총장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모두가 고개를 젓는 일을 추진하는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밀려왔다. 그는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새벽마다 교회에 나갔다.

“그 광야의 시기를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살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 시절의 고난이 감사해요. 저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었을 뿐이고요. 지난 시간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감사’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에게 건강비결을 물었다. “건강비결이요? 별다른 건 없어요. 단순하게 사는 거예요. 고민이 많으면 늙을 수밖에 없어요.” 그는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못 맡기고 근심 걱정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말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믿는 것이 겸손이란 것이다. 그는 평소에도 근심걱정이 생기면 ‘내가 교만하기 시작했구나’라고 생각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했다. 그는 남편 최영상 전 고려대 부총장과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연보

△1943년 서울출생

△1965년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71년 미국 캔자스대학교 대학원 석사

△1975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교 대학원 박사

△1976∼2008년 숙명여대 교수

△1994∼2008년 숙명여대 총장(13∼16대 총장)

△1981∼1985년 제11대 국회의원

△2007∼2008년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

△2009∼현재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글 이지현 기자·사진 김태형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