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언더우드와 대한민국

입력 2011-11-02 18:47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속을 썩이는 딸에게 하는 가장 심한 말은 “시집가서 선교사 부인이나 돼라”는 말이라 한다. 그만큼 타국에서의 선교는 인간적인 고생을 담보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1만7000여명이 넘는 한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세계 각처에서 특히 남들이 가지 않는 오지에서 보여주는 선교활동의 희생적인 삶은 모두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특히 선교사들의 가족과 그중에도 선교사 부인들의 희생과 인내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드라마다.

1885년 부활절 아침, 26살 젊은 청년 언더우드는 한국행 선교를 반대하는 약혼녀의 파혼 통보라는 가슴 아픈 경험을 안고 이 땅에 왔다. 당시 조선은 지금의 아프리카 소말리아를 연상케 할 정도로 무지와 암흑의 땅, 불안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뒤 126년, 한국은 많이도 변했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놀라운 발전을 거듭해 이제는 세계 13위 경제대국, 세계 7위 교역국, 그리고 세계 50개국 이상을 돕는 나라가 됐다. 또 세계 20대 교회 가운데 11개 이상을 가지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소위 축복받은 나라가 되었다. 변변한 자원 하나 제대로 갖지 못한 황무지가 변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은총과 기적의 땅이 된 것이다.

이 모든 발전이 선교사들의 업적이라 강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우리 조국의 근대화와 기적적인 발전의 한 배경에는 아무리 인색하게 평가해도 한국 땅에서 활동하며 한국을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한 선교사들의 교육, 의료, 문화 선교의 기여가 있었음이 분명할 터다.

지난주 나는 언더우드를 배출한 뉴저지 주의 뉴브런스윅 신학교의 도서관에서 깊은 감동을 체험했다. 언더우드 탄생 152주년을 기념하여 언더우드가 다녔던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학교의 도서관 입구에 언더우드 기념 흉상을 제막하는 행사에 그 흉상을 기증한 연세대를 대표해 언더우드가 남긴 사랑의 자취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영광의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교육을 통한 선교와 의료선교 등을 통해 한국사회를 흑암에서 광명으로 빛을 찾게 해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30만명의 동문을 배출한 연세대를 창립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새문안교회를 비롯, 수십개의 교회를 창립한 분이며 4대에 걸쳐 한국을 자신의 몸보다 더 사랑했던 신촌 원씨 시조이기도 한 분이다.

언더우드의 선교철학은 미국식 개신교를 이식시키는 일이 아니라 철저한 토착화 선교였다. 그의 선교 이념은 교파를 초월하는, 넓은 마음을 지닌 열린 기독교의 전파,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는 민족교육, 그리고 합리주의 정신과 실용 정신을 통한 근대화된 고등교육의 실천이었다. 126년 전 언더우드의 교육이념과 선교철학은 요즘 와서 생각해도 시대를 뛰어넘는 혁신적 사고와 미래를 바라보는 비전의 리더십이라 말할 수 있겠다.

유대인들은 매주 집회 때마다 이렇게 묻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그곳에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실 때 당신은 그곳에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구원시켜 바다 밑 깊은 곳 마른 땅을 걸을 때 당신은 거기에 있었습니까? 우리들의 조상들이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뿌리지 않은 열매, 그 땅의 풍요로운 수확을 먹게 되었을 때 당신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까?”하고 묻는다는 것이다. 유대교의 신앙 목표는 이 물음에 “예”라고 분명하게 대답할 때 그 목표가 달성된다는 것이다.

오늘 큰 축복을 자랑하는 한국교회와 우리 모두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은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어떻게 있게 되었는가’일 것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축복에 대해 무엇이라 답하고 있을까?

■ 정석환 교수는 이야기심리학을 통해 보는 성인 발달과 목회상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현재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 겸 연합신학대학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정석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