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4) ‘별종’ 목사, 절대 가까이 해선 안될 이를 품다

입력 2011-11-02 18:00


내가 목회하고 있는 이 산골 마을은 700년 전에 형성된 곳이다. 외지 사람에 대해 무척 배타적인 마을이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교회가 들어오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공회당 같은 곳에서 마을 어른들로부터 ‘기독교는 절대 들어올 수 없다’는 경고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매일 어린이들을 차에 태워 학교 등교를 시키고 사탕도 나눠 줬다. 매주 노인들을 초청해 서양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동네에서 버려진 개를 데려다 키우거나, 먹이가 없어 산에서 내려오는 너구리, 사슴, 여우에게도 먹을 것을 줬다. 사람들은 차츰 나를 ‘별종’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기요토시 사카모토라는 사람이 있었다. 마을 외딴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피부병을 앓고 있는 데다가 영양실조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거기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배회했다. 마을 사람들은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다. 하지만 난 직관적으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았다. 기요토시는 성경의 삭개오처럼 키가 작았다.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초등학교 때 사별했다. 어릴 적부터 홀로 돼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도 왕따를 당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중퇴한 뒤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나는 기요토시에게 다가갔다. 의사에게 데려가 그의 피부병을 진단하기도 했다.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식사도 함께했다. 아내와 나는 피부병이 옮아 심한 고생도 해야 했다. 그렇게 7년간 교제를 해오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술을 끊었다. 몇 년 후엔 담배도 끊었다. 그리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갖다 버리는 냉장고나 TV, 세탁기 등을 가져와서 부품을 떼어다 팔았다. 기요토시와 함께 내 차에 부품을 싣고 팔러 다녔다.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나중엔 TV, 냉장고 등이 마당에 산더미를 이룰 정도였다. 이 사람도 처음엔 나를 ‘별종’이라고 여겼다. 호칭이 ‘사장님’ ‘선생님’으로 차츰 바뀌더니 나중엔 ‘어이’ 하는 사이가 됐다.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것이다. 친구는 내 권유로 저금도 하고, 사람을 고용하기도 했다. 교회를 보는 마을 사람들의 인식도 차츰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지난 4월 중순, 아침 6시에 일어나 개를 데리고 골목 입구에 신문을 가지러 갔을 때다. 기요토시가 판잣집 옆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어이’ 하고 부르며 달려가 어깨를 흔들었지만 기척이 없었다. 죽어 있었던 것이다. 지난 26년간 나와 가장 친밀했던 최고의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온 기요토시가 자신의 몸을 나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피부병으로 온몸이 벌겋게 돼 있었다. 가뭄의 논바닥처럼 온몸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끔찍했다. 나는 청계천 빈민가에서도 그런 몸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기요토시가 항상 지옥 같은 곳에서 혼자 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이 늘 기요토시 옆에 계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요토시가 틀림없이 지금쯤 예수님 품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으리라 믿는다. 거기서 알코올이 아닌 포도주를 마시며 자신이 겪은 고생을 위로받고 있으리라.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건 가난하거나 고통 받는 사람들, 사회의 다수로부터 거부당한 사람들 편에 서 계셨다. 내가 평생 섬겨온 예수님은 그런 분이시다. 나는 평생 그런 예수님을 섬기는 특권을 누려왔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