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의가 최우선입니다
입력 2011-11-01 17:51
마태복음 6장 33절
얼마 전 ‘교회 무용(無用)론’을 주장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도대체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냐고 따졌습니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자랑과 경쟁, 이기와 배타를 일삼는 교회가 적지 않다고 했습니다. 또 세속적 시류에 저항하지 못하는 교회와 교인이라면 세상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교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로서 일말의 책임을 느끼게 하는 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득 그 사람의 항의를 들으며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바로 세상을 향해 ‘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문으로 ‘옳을 의(義)’입니다. 의란 무슨 뜻일까요. 의는 존귀한 것입니다. 의는 그 자체로 진실이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의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질서가 있고 위엄이 있습니다. 만사에 공평한 것입니다. 또 의는 나타난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승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의는 실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의를 행함은 우리 모든 삶의 최우선이 돼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삶도 그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의로 산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율법을 무너뜨리고 자유분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라고 로마서 3장 31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의에 목마른 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이고 열매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엄격한 명령입니다. 다른 이유를 말하거나 둘러댈 수 없는 경건생활을 하라는 인생의 도그마(dogma)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의를 팔아 불의를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 불의를 사는 것과 같습니다. 불의와 야합하면 의는 굽어지는 법입니다. 굽어진 의는 죽은 의이기에 결코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없습니다. 버려진 소금처럼 밟혀질 뿐입니다.
요즘 세상은 의에 무심합니다. 멸시하고 푸대접합니다. 사람들은 의를 멀리하는 타성에 빠져 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타성은 교회 내부까지 침투했습니다. 마치 빠른 비행기 안에서는 속도감을 느끼지 못하듯, 이미 불의의 타성에 길들여진 ‘의 불감증’은 불의를 느끼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작금의 세태입니다. 그래서 의는 고독합니다. 불의에 묻혀 신음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이 시대를 보시는 주님의 고통이고 아픔일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예루살렘 거리에서 한 사람의 의인을 찾지 못한 하나님의 슬픔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크리스천의 역할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진정한 교회와 성도의 삶은 밖으로 드러나는 요란스런 구호나 선전이 아닐 것입니다.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냅시다. 그리하면 세상은 교회를 절대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볍게 넘볼 수 없는 불가침 존재의 영역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을 달리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남기표 목사 퇴계원사랑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