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병권] 학벌사회 타파

입력 2011-10-31 17:36


서울 이문동 한국외국어대 서울캠퍼스가 시끄럽다. 본교와 분교인 용인캠퍼스의 통합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학교 측의 처사에 반발한 서울캠퍼스 학생들이 비상총학생회를 소집해 저지에 나섰기 때문이다. 학교 측은 교육과학기술부의 대학 선진화 방침에 따라 본교와 분교를 통합하지 않으면 국고지원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서울 캠퍼스 학생들의 반대 이유는 명백하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인 서울’(서울 소재 대학 입학)했는데 분교 학생들이 학벌세탁 하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외대는 용인캠퍼스 졸업생이라도 일정 학점 이상을 받고 서울에서 한 학년을 더 다니면 본교 졸업장을 주겠다는 입장이다.

청년들 좌절시킨 스펙경쟁

본교와 분교생들의 이 같은 갈등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뿌리 깊은 학벌주의 때문이다. 이름 있는 대학을 졸업해야 대기업 입사 등에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개인이 가지고 있는 품성이나 실력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스펙을 중시하기 때문에 빚어진 서글픈 현상이다.

외국어대 통합 문제뿐만이 아니다. 학벌을 가문처럼 중요시하니 고등학교 입시 때부터 과열 양상을 보인다. 지금은 좀 수그러들었지만 한때 극성스러운 학부모들이 자식들을 외국어고에 보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적이 있었다. 학원에서 외고 입시 문제를 사전에 가르쳐줬다가 구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외고 입학이 명문대 입학의 지름길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언제부턴가 알게 모르게 사람의 조건을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갈수록 농후해지고 있다. 가령, 결혼 상대자를 찾는 맞선 시장에서도 돈, 외모, 학력 등을 보고 실제 그 사람의 인품, 성격, 가치관 등은 도외시하고 있다. 결혼중개업체 자기 소개란에도 부모의 직업, 재산 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럴진대 대학에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가치관 정립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인문학을 공부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다. 취업에 유리한 과목에 올인하느라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애초부터 안중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 문학과 사학 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교양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이제 흘러간 옛 말이 됐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이 같은 현상을 지켜 볼 수만은 없다.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젊은이들이 온통 스펙에 쌓여 패기와 용기를 잃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학벌보다는 실력, 스펙보다는 협동심, 애국심, 헌신성 등을 높이 평가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대학 문을 나서면 가장 먼저 몸을 담을 직장에서부터 이 같은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실력이 평가받는 사회돼야

얼마 전부터 금융권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직장에서 고졸 출신들을 대규모로 다시 뽑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이 문제에 해답을 주고 있다. 선망의 직장인 은행권에서 고졸 신입사원들을 뽑기 시작한 것이다. 지원자끼리 체육관 안에서 운동을 하게 하고 면접관들이 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는 순서도 있었다고 한다. 배려심이 많고 협동심이 있는 젊은이를 고르기 위한 방법이리라.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학벌 중시 경향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이 시작돼야 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의 정상화를 실현할 수 있다. 미래의 희망인 대학을 스펙 쌓기 경연장으로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