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1) 미국 추방… 그리고 태평양 건너까지 온 감시의 눈길

입력 2011-10-30 19:05


나의 고난은 엉뚱한 데서 시작됐다. 어머니 가츠코는 소비자운동을 하며 미국과 중국, 소련의 초청을 받아 갈 만큼 이름이 알려졌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우리 가족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마 미국 입장에서는 나를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미국 유학 시절, 어느 날부터 기숙사 뒷문 입구에 자동차가 멈춰서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어김이 없었다. 어느 날은 이민국에서 나를 불렀다. 외국 정부를 전복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다며 나를 ‘위험인물’이라고 했다. 추방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은 FBI 요원이 찾아와 “오랫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데 추방되는 게 불쌍하다. 만약 원한다면 일본으로 잘 보내주겠다”고 했다. 난 거절했다. 그리고 내 돈으로 일본에 돌아왔다. 그리고 11년이나 나를 기다려준 아내 요리코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다음날인 주일,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쳤다. 모르는 백인이었다. “네 친구들 중 한 명”이라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하는 그 말뜻을 그때는 몰랐다.

그 후부터 내게는 당근과 채찍이 번갈아 기다렸다. 매일같이 편지가 왔다. 하지만 상대방 주소가 없었다. 편지 내용은 ‘요코하마역 북쪽 출구에서 구두를 닦고 있으세요’라고 되어 있었다. 요리코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친구가 있어서 다녀와야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편지대로 그 위치에서 구두를 닦고 있으니 옆에 앉은 사람이 ‘앞에 커피숍으로’라고 얘기한 뒤 사라졌다. 커피숍에 들어가면 누군가 ‘호텔 몇 호실’ 하고 말을 건넨 뒤 나갔다. 완전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호텔에서 사람을 만나 나눈 이야기는 별 내용이 없었다. 그것은 말을 잘 듣는지 안 듣는지 나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일은 반복됐다. 어느 날은 ‘만약 우리에게 협력해준다면 J F 케네디의 이름으로 미국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증명서를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완전히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 신세와 같았다. 나는 당시 바닷가 어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한 요원이 이렇게 말했다. “이 바다는 참 조용하고 깨끗하군요. 그런데 만약 이 잔잔한 바다에 노무라씨의 시체가 떠 있는 것을 부인이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머리가 쭈뼛 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1968년 7월경,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여름수양회 강의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도쿄 근처에서 갑자기 뒤따라오던 차 한 대가 내 차 옆을 치고 도망갔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교통사고였다. 그때 당한 중상으로 지금도 옆구리에서 등까지 꿰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병원에 있었는데 또 다시 편지가 왔다. 가마쿠라 역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도쿄에 입원해 있던 나는 도저히 차로 4시간 거리의 가마쿠라까지 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요리코를 보냈다. 손에다가는 영어로 된 큰 글씨를 들려줬다. ‘I am Nomura's wife. Nomura is at a hospital now(나는 노무라의 부인입니다. 노무라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요리코는 그 종이를 든 채 가마쿠라역 앞에서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기다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더 이상 어떤 연락도 없었고,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다. 미국은 나를 베트남전 스파이로 보내기 위해 무지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1970년대 이후엔 한국의 국군 보안사령부가 나를 감시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