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회심-윤승록 동아시아CCC 대표]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 청춘의 마음을 울리다

입력 2011-10-30 19:10


1975년 아카시아 꽃이 한창이던 봄. 내가 활동하던 공주사범대학교 수요문학회에선 문학의 밤을 열고 시인 고은씨와 소설가 황석영씨를 초청했다. 모임을 갖던 중 학생 한 명이 그만 유신 체제에 대한 항의 표시로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고 나와 반정부 발언을 해 버렸다. 그 자리에 와 있던 형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지도 교수님들은 징계를 받았고, 여러 명의 학생은 정학 처분을 받고 군대로 가버렸다.

결국 문학 서클은 해체됐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그 사건으로 정학을 받았던 친구 최영철(현재 캐나다 토론토에서 목회 중)을 만났다. 그는 밝게 웃으면서 “대학생선교회(CCC)의 회원이 되었다”며 나에게 성경공부 모임에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나는 어린 시절 집 가까이에 있던 나사렛성결교회 주일 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가면 중요 절기마다 연필과 공책을 주곤 했다. 그렇게 교회와 친숙하게 됐고 간혹 경건한 분위기에 끌려 혼자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내 마음에 남아 있던 질문은 ‘왜 예수님이 참혹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머리로는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마음으로 이해하고 믿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존재와 은혜, 축복,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듣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피를 흘리며 죽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늘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때 가까운 성결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문제해결은 고사하고 교회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됐다. 열정적으로 통성 기도하는 모습이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온 것이다.

내 인생의 회심은 75년 늦가을에 일어났다. 대학에 입학하고 다시 다니기 시작한 공주감리교회 수요예배 때 목사님이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는 설교 말씀을 전했다. 마치 하나님께서 “승록아, 겨울이 오기 전에 나를 향해 더 가까이 오라”고 부르시는 음성처럼 들렸다. 마음속에 큰 울림이 있었다.

그 사건 후 최영철의 초청에 따라 12월 마지막 주 공주CCC회관에서 열린 수련회에 참석했다. 강사는 CCC 총무 목사님이었는데 로마서 강해를 해 주셨다. 신기하게도 그곳에서 로마서를 공부하던 중 그간의 질문이 해결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서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와 비록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 왔으나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나의 죄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셨다는 사실이 가슴 깊이 박혔다. 나는 성경공부 내내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모셔 들였다. 그리고 주님이 필요하다고 간절하게 고백했다.

로마서를 배우던 둘째 날 밤 성경공부를 마치고 여러 명이 돌아가며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엔 이미 내 마음속에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 차 있었다. 특히 내가 다니던 국어교육학과 친구들과 학교,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수많은 이들을 위해 땅 끝까지 가서라도 전해 주고 싶다는 열망이 넘쳤다.

기도가 시작되고 성령께서 임하셨다. 동일한 경험을 세 차례나 한 후 성령님의 역사가 멈췄다. 나의 지적인 교만과 냉랭한 마음은 산산이 깨어졌다. 그해 겨울방학 내내 성경을 읽는데 얼마나 깊이 깨달아지는지, 기쁨이 흘러 넘쳤다. 그리고 대학 4학년 1년 동안 매일 친구들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새벽마다 기도를 드리며, 사영리 전도를 했다. 한 해 동안 국어교육과 친구 26명 중 13명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반 정도 서산 해미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해미장로교회를 섬겼다. 즐거운 교회생활과 함께 학생들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어느 날 나를 지도해 주셨던 유정희 목사님(전 CCC 총무)이 “78년 부산 CCC에서 울산공대를 개척하는데 간사가 되어 울산에서 사역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셨다. 당시 나는 교회 생활과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기에 고민이 컸다.

계속해서 기도하던 중 78년 6월 어느 늦은 밤.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 6장을 읽던 중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8절 말씀에서 멈췄다.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너무나 크고 생생했다. 그 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나도 모르게 헌신하고 응답했다. 그리고 7월 25일 CCC 간사가 되었다. 그렇게 울산공대 사역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학원 전도자의 삶을 살고 있다. 주님이 젊은 날 교회를 다니면서도 방황하던 나를 변화시켜 주셨듯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삶의 목적과 참된 진리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나를 전도자로 사용하고 계신다.

학원의 현장에서 만났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은 즐겁고 보람된 일이었다. 사영리라는 작은 전도 책자를 통해 무수한 젊은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고 삶을 주님께 헌신하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이다.

지금은 동아시아 대학생선교회(East Asia Orient) 대표로 동아시아의 7개 나라(한국, 북한, 일본, 대만, 몽골, 싱가포르, 파키스탄)의 젊은 대학생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다. 아직도 그리스도를 모르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함께 일하는 1400여명의 전임 간사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복음 안에서 살아가도록 성경 말씀으로 기초를 놓는 일을 하고 있다.

올해 6월에는 젊고 유능한 몽골 간사 세 사람이 울란바토르에서 5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사역을 마치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다가 차량 전복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처럼 지난 33년 간 사역하면서 많은 젊은 사역자들과 가족들이 선교지에서 사고로, 질병으로 생명을 잃는 것을 숱하게 보았다.

오늘도 동역하다 먼저 하나님께로 간 전도자들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던 아내와 아이들,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그들의 믿음과 용기, 인내와 사랑을 생각해 본다. 아직도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 복음 전하는 자를 기다리는 무수한 영혼들이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고 한 주님의 약속을 생각해 본다.

윤승록 대표

1954년 부산 출생으로 77년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78년 한국대학생선교회 간사를 시작으로 91년 CCC 인천지부 책임간사 및 경기도 대표간사를 역임했다. 99년 CCC본부 선교국장을 맡았으며, 2008년부터 동아시아 CCC 대표직을 수행하고 있다. CCC 간사 출신인 아내 박현희씨와 슬하에 1남1녀가 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