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35)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3
입력 2011-10-30 17:53
日 “사과하겠다” 교회에 주민 모으고 불 질러
3·1운동 당시 발생한 일제의 탄압 중 ‘잔인한 학살’로 알려진 한 가지 사건이 1919년 4월 15일 발생한 ‘제암리 학살사건’이었다. 경기도 수원군(현재의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의 제암리(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학살사건은 3·1운동 당시의 일제의 만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이 사건이 전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으로만 볼 수 없다는 주장을 감안하더라도, 이 사건이 기독교인과 교회를 탄압한 사건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 학살은 이 지역의 만세운동에 대한 일경의 의도적 보복이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는 5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제암리 주변을 포함한 수원지방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제암리는 흔히 ‘두렁바위’로 불리는 곳인데, 3월 30일 이곳 발안 장터에서 1000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경찰은 군중을 해산시키며 진압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제암리교회의 강태성 김정헌 안봉순 안진순 안종후 홍원식 등이 일본 경찰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기도 했다. 시위 군중이 거세게 항의하자 일본인 정미업자 사사카(佐板) 등 43명이 30리 밖 삼괴 지역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인근 지역인 우정면, 장안면, 반월면 지역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다음날인 4월 1일에도 제암리 주민들은 발안장 주변 산에 봉화를 올리며 시위하였고, 4월 2일 일경은 검거작전을 시작하여 마을을 습격·방화하고 시위 주모자를 검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 사람이 사망하였다.
일제의 제암리교회 방화 만행
4월 5일에도 제암리 발안 장날 시위가 일어나자 검거반이 투입되었다. 이런 시위와 진압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 가와바다(川瑞豊太郞)가 살해되기도 했다. 다시 검거작전이 개시되어 4월 13일에는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여 제암리 주모자들을 체포하고자 했다. 특히 4월 15일 오후 2시쯤 아리타 중위는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왔다. 이들은 “만세운동을 과도하게 진압한 일을 사과하려고 왔다”며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는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사전에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오기까지 했다. 이들은 예배당을 포위한 뒤 교회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을 탈출하려는 이들에게는 사격을 가해 두 사람이 피살되었고,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19세의 여성도 군인에게 살해되었다. 교회당의 불길은 민가로 번져 제암리의 33채 가옥 중 외딴 집 2채를 제외한 31채가 불탔다. 교회당 방화로 37인이 불에 타 죽었는데, 이 중 기독교인이 12명이었고, 나머지는 천도교인이었다. 12명의 기독교인 중 11명의 명단이 알려져 있다. 그들이 안종후 안진순 안봉순 인필순 안태순 안유순 강태성 김정헌 홍원식, 그리고 강태성의 부인 김씨, 홍원식의 부인 김씨 등이다. 군인들은 10분 거리에 있는 고주리 마을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다시 총살했다.
이때의 학살에 대해 김병조, 손정도 등은 중국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어찌 이런 잔혹한 행위가 오늘과 같은 문명 시대에 일어날 수 있습니까? 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도 제멋대로 칼로 찔러 죽였는데, 그 잔인한 참상은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은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풍찬노숙으로 떠돌아다니며 방황하였고, 통곡의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일제 만행을 알리다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비의도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즉 조선에 주둔한 지 얼마 안 되어 현지 사정에 익숙지 못한 일부의 군인이 흥분한 상태에서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들이 제암리 지역 기독교 및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면 이런 주장을 신뢰할 수 없다.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된 것은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한 것이었다. 사건이 발생한지 하루가 지난 4월 16일 캐나다 출신 선교사로 세브란스 의사였던 스코필드(Dr Frank W Schofield)는 언더우드, 커티스(F S Curtis), 기자인 테일러(A W Taylor) 일행과 자동차로 수촌리 현장을 확인하러 가던 중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하고 사진에 담았다. 스코필드는 4월 18일 제암리와 수촌리를 다시 방문한 이래 여러 차례 오가면서 사후 수습을 돕는 한편, 이때의 만행 기록인 ‘수원에서의 잔학한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어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후에 이 글은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란 소책자로 발간되어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이런 학살은 제암리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신용하 교수에 의하면 평안남도 강서(江西)의 옥천(沃川), 원장(院場) 양 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49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당한 강서학살 사건, 평안남도 맹산(孟山)에서 기독교인 60여명을 학살한 맹사학살 사건 등 이와 유사한 사건이 1919년 3월과 4월 여러 곳에서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선교사들은 일제의 식민지배의 실상을 보게 되었고 이를 방관할 수 없다는 심리적 합의에 이르게 된다. 그 일단이 “잔인함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다(No neutrality for brutality)”는 인식이었다.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