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 특정 지명·장소 끊임없이 호출… 첫 시집 ‘동해와 만나는 여섯 번째 길’ 낸 손정순 시인
입력 2011-10-28 17:53
2001년 월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손정순(40·사진) 시인이 10년 만에 낸 첫 시집 ‘동해와 만나는 여섯 번째 길’(작가)엔 수많은 장소들이 등장한다. 차례를 대충 훑어봐도 변산, 장호황, 청령포, 사패능선, 마량포구, 노고산동, 몽산포, 무창포, 해미읍성, 당진 왜목리 등 특정 지명이 등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운문댐, 붉은 토끼성(城), 건넌방 등 특정 공간들이 거명된다.
“그해 겨울, 운문 지서와 우체국 옆으로 검은 아스팔트 공사가 시작되고, 구름마을은 입 큰 물귀신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마을 한복판에 매달린 둔중한 종소리가 온 들판에 울려퍼지면, 자전거를 타고 깔깔거리던 그 플라타너스 길도 지도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습니다.”(‘운문댐 그 후’ 부분)
시집은 이렇듯 특정 장소와 공간을 호출하는 서정의 시편으로 채워지고 있는데 그 출처는 다름 아니라 기억이라는 물질이다. 경북 청도군 운남면에서 유년을 보낸 시인은 그해 겨울, 운문댐 건설로 인해 마을이 수몰되던 광경을 환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다음 기억은 도회로 거처를 옮긴 아버지에 관해서다.
“어릴 적 아버지는 밤새 낚아온 화금붕어 두 쌍을/ 뒤뜰, 흙으로 빚은 장독 속에 풀어놓았다/ ‘아빠, 우리도 잘 보이게 예쁜 유리어항에다 키워요?’/ ‘안된다, 저들도 비밀이 있는데 우리가 훔쳐보면 곤란하지?’”(‘금붕어 이야기’ 부분)
금붕어 식구들이 늘어가는 것을 보고 자란 시인의 기억은 다시 꿈 많던 열아홉 시절로 거슬러 오른다. “내 나이 열아홉,/ 서울은 팔팔 올림픽에 들떠 있었고/ (중략) / 다시 봄이 오고, 잘난 애인은 매일 도서관 앞에서 선동을 주도하고/ 그 현기증 나는 원형계단 앞에 나를 종종 앉혀놓기도 했네/ 대자보를 썼네, 어머니가 가르쳐주셨던 그 붓글씨체로”(‘노고산동’ 부분)
시인은 이렇듯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간절했던 기억의 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다. 손정순은 길 위의 시인이자 기억의 시인이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