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봐라 … 농구 포청천 떴다… 한국농구연맹 첫 여성 심판위원장 강현숙
입력 2011-10-27 18:11
25일 서울 논현동 한국농구연맹(KBL) 사무실 5층 심판교육장. 21∼23일 열렸던 프로농구 8경기에 대한 판정이 적절했는지 여부를 놓고 연맹 소속 심판 27명이 모두 모여 열띤 논쟁을 벌였다.
연맹이 매주 화∼금요일 주관하는 심판교육은 오전 10시부터 두 시간 동안 강도 높게 진행된다. 이날 김동규(73) 심판교육관은 리바운드 다툼이 벌어졌을 때 심판이 어느 위치에 서야 시야를 잘 확보할 수 있는지 녹화 화면을 보면서 설명했다. 사례는 22일 창원에서 열렸던 고양 오리온스와 창원 LG 간 경기에서 적용된 인텐셔널 파울(고의 파울)의 적절성 여부. KBL은 올 시즌 인텐셔널 파울을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 시즌 경기당 평균 0.4개였던 것이 올해는 평균 0.9개로 대폭 증가했다. 27명의 심판이 비디오 화면을 보면서 각자 자신의 견해를 밝힐 무렵 키가 훤칠한 중년 여성이 끼어들었다.
“인텐셔널 파울 적용은 이번 시즌에서 특히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당시 경기에서 부적절하게 콜(판정)을 했다는 의견이 많지만, 위축되지 말고 자신감 있고 과감하게 판정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독이나 선수, 구단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일관성을 갖고 판정해 주시면 됩니다.”
심판교육장의 분위기를 주도한 주인공은 바로 강현숙(55) KBL 심판위원장이었다. 1997년 출범한 남자 프로농구에서 심판위원장은 항상 남성의 몫이었다. 그런데 지난 9월 한선교 KBL 총재는 여성인 강씨를 전격적으로 임명했다. 1970년대 여자 농구를 주름잡았던 강 위원장은 직전까지 대한농구협회 기술이사를 맡고 있었다. 남자 농구판의 ‘포청천’ 자리에 오른 강 위원장을 25일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여성 등장에 떨떠름했던 남자 프로농구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한 총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나요?
“(손사래를 치며) 전혀 몰라요. 듣기로는 구단 단장님들도 총재님에게 그걸 많이 물어본 모양인데, 총재님이 ‘강 위원장과는 차 한 잔 마셔본 적 없다’고 말한대요. 실제로 그래요.”
-한 총재가 강 위원장을 전혀 몰랐을 리 있나요?
“총재님이 워낙 골수 농구팬이라 저를 선수 때부터 알았대요. 국회의원인 총재님의 지역구가 용인인데 여자 프로농구팀 삼성생명의 홈구장이 있는 곳이거든요. 제가 대한농구협회 기술이사라서 선수선발과 관련해 여기저기 경기를 보러 다녔는데 그때 저를 용인에서 봤대요. 우연히 만나서 한 번 인사 나눈 게 전부예요.”
서울 광희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농구를 시작한 강 위원장은 무학여중-무학여고를 나와 외환은행에 입단했으며 1973년부터 1980년까지 국가대표를 지냈다. 여자 대표팀이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79년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을 할 때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국제농구연맹(FIBA)이 선정하는 여자농구 베스트5 포인트가드 부문에 두 번이나 선정됐을 정도로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냈다. 80년 결혼과 함께 은퇴했지만 86년 아시안게임 때 자원봉사를 한 것을 계기로 농구계 행정업무를 조금씩 돕게 됐다. 지난해 체코 세계선수권대회와 올 8월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여자농구 대표팀 선수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 총재가 왜 심판위원장직을 제의했다고 봅니까?
“어느 날 한 총재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남자농구를 한번 바꿔보고 싶은데 도와 달라고 하면서. 그 때 상당히 당황했죠. 저는 주로 여자농구 일을 해 왔고 심판 일은 해보지 않았거든요(그는 심판자격증도 없다). 경험도 없는 남자농구에서 더더구나 위원장까지 맡는 것은 조심스러웠어요. 그러다 고민 끝에 수락했습니다. 그간 남자농구계에 있었던 심판에 대한 불신, 불미스러운 일들을 투명하게 해결하고 싶다는 총재의 의지를 받아들였죠.”
KBL 심판진 27명의 운용을 총괄하는 심판위원장은 권한이 막강하다. 심판의 선발과 교육, 경기 배정에 대한 전권을 갖고 있다. 농구는 심판 판정에 따라 경기 흐름이 크게 좌우되는 경기라 심판위원장의 영향력이 작지 않다.
-남자농구가 학연이나 지연에 얽매이는 바람에 발전이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일부 비판적인 농구인은 고려대와 연세대, 용산고 등 특정 학교 인맥이 농구판을 좌지우지하면서 농구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데요.
“그런 학연이나 지연이 논란이 되니까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거 아닌가요. 저는 농구계의 학연이나 지연하고 관련 없죠. 사심 없이 일할 거예요. 심판들도 학연이나 지연에 얽매여 판정하지 않을 거라 믿어요.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하면 단호하게 처리할 겁니다.”
-강 위원장의 임명에 남자 프로농구계가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하던데.
“‘어서 옵쇼’ 이런 말은 안 하죠. 여자 심판위원장이 와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게 당연하기도 하고요. 오히려 우려를 갖고 있는 점 감사하게 생각해요.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개인기 없으면 남자농구 앞으로 힘들 것
-취임한 지 한 달 조금 넘었는데 프로농구 수준이나 심판 수준은 어떻게 보시는지.
“기술위원장 시절에는 선수들 플레이 위주로 경기를 봤죠. 그런데 지금은 심판이 먼저 눈에 들어와요. 위치나 판정, 이런 게 먼저 보이더라고요. 우리 심판들 중 베테랑이 많아서 그런지 판정을 잘 해요. 그리고 우리만큼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곳이 다른 나라에 없어요. 심판은 감독과 선수, 구단에 일관된 태도로 신뢰감을 주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심판들에게 특별히 주문한 것은 경기가 박진감 있고 스피디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운영해 달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수비하다가 작전상 반칙을 하는 것은 고의적인 파울로 지적해서 경기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거죠.”
-취임 일성으로 판정 개선과 심판 평가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는데.
“매 라운드가 끝나면 경기보고서를 분석해 주심을 1, 2부심으로 강등하거나 반대로 부심을 주심으로 승격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 중이에요.”
KBL은 올 시즌부터 정규 경기에 대해서도 비디오 판독제를 도입했다. 같은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 미국 프로농구 NBA를 벤치마킹했다.
-경기장에는 자주 가보는지요.
“지금까지 10개 구단 중 7개 구단 경기장에 가봤어요. 조만간 울산에도 가볼 예정입니다. 주말에는 사무실에서 두 대의 모니터로 중계 경기를 다 보고 심판으로부터 직접 보고도 받아요. 판정이 잘못된 것은 다음날 교육시간에 서로 토론해서 바로잡기도 하구요.”
-한국 남자농구는 오랫동안 올림픽 무대에 서지 못했습니다. 아시아 내에서도 벽이 높은 것 같은데.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아시아 농구가 예전보다 높이뿐만 아니라 파워도 좋아졌어요. 특히 이란, 요르단 같은 나라의 신장세가 놀라워요. 신장도 좋고 파워도 좋으니 우리 선수들도 파워와 높이, 스피드를 갖추지 않으면 경쟁하기 힘들 거예요.”
-올림픽에 나가려면 어떤 점을 갖춰야 할까요.
“신장과 파워뿐만 아니라 개인기도 갖춰야 하는데, 우리 선수들 개인기가 오히려 예전만 못한 거 같아요. 어릴 적부터 개인기를 단단하게 다져야 하는데 드리블, 패스, 슛 모두 좀 아쉽습니다.”
남자농구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7위까지 떨어지며 ‘2류’라는 치욕을 당했다. 지난달 중국 우한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선전하며 3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올림픽 직행 티켓은 따내지 못했다. 3위 입상으로 5장의 올림픽 티켓이 걸린 프레올림픽에 진출해 패자부활을 할 수 있는 기회는 확보했다. 그렇지만 각 대륙에서 쟁쟁한 팀들이 나올 예정이라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심판 좋아하는 팬들도 생길 수 있다
프로농구는 2008∼2009시즌에 122만8855명이 코트에 입장, 통산 최다 관중을 기록한 뒤 2009∼2010시즌 113만6980명, 2010∼2011시즌 115만4948명으로 하락 내지 정체 상태다. 프로야구가 올 시즌 600만 관중 시대를 열며 국민스포츠로 자리잡은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초라하다.
-국내에서 남자농구 인기가 하락세라 인기 회복을 위한 방안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좀 더 몸싸움을 허용하고 개인기를 기르는 방향으로 가야죠. 물론 올림픽과 같은 국제대회도 자주 참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기 힘들 거예요. 그리고 2군 리그도 반드시 활성화돼야죠. 프로화가 진전되면서 주전 선수에만 의존하는 현상이 일어나요. 감독이 성적에 신경을 쓰다 보니 그런 거죠. 주전 선수든 비주전 선수든 치열한 경쟁을 통해 발전이 이뤄져야죠. 스타플레이어라도 게으르고 경기에 열심히 임하지 않으면 다른 선수에게 뛸 기회를 주는 게 맞습니다. 스타플레이어는 물론 필요해요. 하위권이었던 인삼공사가 올해 오세근 선수 투입을 계기로 성적이 오르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저는 선수뿐 아니라 잘하는 심판에게도 팬이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끝으로 심판위원장으로서 포부를 말씀해주세요.
“저는 심판위원장 자리에 연연하지 않아요. 농구에 대한 열정과 애정 때문에 이 자리에 온 거죠. 농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수나 감독, 심판 모두 지금보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저에게 보장된 임기가 2년인데 초심을 잃지 않고 일관된 경기 운영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