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3관왕 애니 ‘돼지의 왕’ 연상호 감독 “절망하는 하류인생,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입력 2011-10-27 17:53
지난 14일 폐막한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307편 가운데 유달리 눈길을 끈 작품이 있다.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넷팩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CGV무비꼴라쥬상 등 3관왕에 오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이다.
10여년 전부터 꾸준하게 단편 애니메이션 작업을 해 온 연상호(33·사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비참한 처지로 내몰린 중학교 동창생 황경민과 정종석이 10여년 만에 만나 학창시절 함께 겪었던 끔찍한 사건을 회고하며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다음 달 3일 개봉되는 ‘돼지의 왕’(청소년 관람불가)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대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린다.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착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성인 관객이 타깃이지만 ‘블루 시걸’(1994)과 같은 에로물도 아니다. 국내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의 잔혹 스릴러를 표방하는 이 작품은 묵직한 주제를 강풀의 만화 같은 묵직한 톤의 이미지 속에 거칠고도 대담하게 담아낸다.
25일 서울 서교동 한 카페에서 연상호 감독을 만났다. 그는 “하류층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 어떻게 해보려 해도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절망하는 그들의 감정을 관객들이 경험해 보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의 한 중학교를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흘러가는 ‘돼지의 왕’은 무기력한 급우들을 사정없이 짓밟는 학생 패거리들과 ‘괴물’이 되어서라도 그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찍힌 아이들의 세계, 커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리는 하류층의 세계를 섬뜩하게 그려냈다.
영화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연 감독이 학창시절 경험과 주변에서 들은 목격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저는 압구정동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는데, ‘돼지의 왕’에 나오는 학교와 분위기가 비슷했어요. 학생들 간에 빈부격차가 심하고, 위계질서도 확실했죠.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애들이 권력자처럼 다른 애들 위에 군림했거든요.”
그는 2006년에 시나리오를 준비했지만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워 거기에 투자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말을 해요. 더욱이 ‘돼지의 왕’은 낯설고도 ‘쎈’ 작품이라 상업영화 논리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였어요. 내심 포기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독립영화 제작지원을 해 온 KT&G 상상마당에 신청했는데 채택돼 1억500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었던 것.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제작비가 30억원가량 드는 게 보통이지만 그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돼지의 왕’을 만들었다고 했다.
배경 그림 1200여장을 미술감독과 둘이서 모두 그렸고, 캐릭터의 기본 그림인 원화 작업에도 직접 참여하는 등 최소한의 인원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목소리 연기에는 2006년 단편영화제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온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과 배우 오정세 김혜나 박희본 김꽃비 등이 참여했다.
영화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고 있지만 그는 흥행 가능성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는 “5만명이면 손익분기점을 넘길 것 같은데 상영관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며 “‘돼지의 왕’이 관객들에게 통한다면 침체된 우리 애니메이션계도 앞으로 할 게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북미나 유럽에서는 흥행에 성공하는 성인 애니메이션들이 심심치 않게 나와요. 우리도 강풀 등의 성인만화가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어요. 기존 것들과는 차별화된 다양한 애니메이션들이 나올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커지는 거죠.”
라동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