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8)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 미국 사역
입력 2011-10-27 19:38
中서 美로 건너간 선교사 2인 ‘사역+독립운동’ 새 길
많은 선교학자들은 1913년부터 1917년까지 중국 산둥(山東)성 라이양에서 활동했던 3명의 선교사에 대해 도중하차라는 이유를 들어 실패한 선교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과연 그렇게만 봐야 할까. 선교지에서 무단이탈한 김영훈 사병순 목사는 훗날 어떻게 됐을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두 목사를 책벌하지 않고 관대하게 처리했다. 취재팀은 총회의 관대한 처분으로 징계를 면한 두 목사가 고국에서 목회 활동을 포기한 뒤 미국으로 건너간 기록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들의 행적이 현지에 어느 정도 남아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지난 20∼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 등지를 찾았다. 그러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환영 속 미국생활을 시작한 김영훈 사병순 목사
지난 20일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상항(샌프란스시코)한국인연합감리교회다. 이 교회는 1903년 도산 안창호 선생과 몇 명의 한인들이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 중 기독교인들이 숙소를 순례하며 기도회를 가진 게 계기가 돼 세워진 상항한국인감리교회의 후신이다.
취재팀은 이 교회 담임인 송계영 목사와 장석헌 장로와의 인터뷰를 통해 9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김영훈 사병순 목사의 미국행은 물론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교회 활동을 알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러다가 기자의 눈길을 끈 게 있었다. 교회 내부에 걸려 있는 교회 역사를 담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던 중 갑자기 전율이 느껴졌다. 낯익은 얼굴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바로 김영훈 목사의 사진 2장이었다. 1920년 12월 19일 ‘영코리안아카데미’ 제7회 총회 사진과 1921년 12월 18일 ‘흥사단’ 제8회 북방대회 사진이었다. 취재팀의 미국행에 앞서 입수한 두 목사의 관련자료(신한민보 1917∼1925년 자료)가 현장에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교회로부터 건네받은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과 교회,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의 역사’에서 낯익은 이름을 찾아냈다. 이 책 부록 726∼727쪽 ‘한인교회들의 통계(1914-2002)’에서 김 목사 이름이 또다시 발견됐다. 이 통계에 따르면 그는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새크라멘토 한인교회 목사로 있었다. 이는 취재팀이 갖고 있는 것과는 다소 상이했다. 신한민보 1919년 6월 10일자는 ‘김영훈씨의 목사 피임 새크라멘토 교회관리’라는 제목으로 김 목사가 새크라멘토 교회 담임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통계에 따르면 김 목사는 1921년 맨티카와 맥스웰, 윌로스, 소톡톤 한인교회의 순회 설교자로 있었다. 당시 교세도 구체적으로 나와 있었다. 새크라멘토 교회 출석교인은 1917년 51명, 1918년 70명, 1919년 47명, 1920년 67명 등이며 1921년 맨티카 교회 출석교인은 20명, 맥스웰 교회는 35명, 윌로스 교회는 30명, 스톡톤 교회는 22명 등이었다.
김영훈 사병순 목사의 90여년 전 흔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두 목사는 1917년 7월 20일 ‘차이나’호를 타고 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해 7월 26일 신한민보에 따르면 그 배에는 리혜두 리석원 박영관 김극로 박영섭 오정수 김유신 등 여러 한인과 미주에서 거주하는 한인들의 약혼자들이 동승하고 있었다. 두 목사는 상항한국인감리교회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7월 30일 오후 8시30분 옥 스트리트에 있는 이 교회에서 두 목사의 미국행을 환영하는 행사가 이대위 담임목사의 인도로 열렸다. 두 목사는 다음 달 29일 맨티카 한인회가 주최한 국치기념행사에도 참석하고 조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애국가를 목청껏 불렀다. 사 목사는 이날 기도를, 김 목사는 ‘장래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연설까지 했다. 그해 가을 김 목사는 상항한국인감리교회에서 열린 추수감사절 예배에서 중국어로 연설했다. 이는 중국 선교사 경력을 인정받아 특별순서를 맡은 그가 예배에 참석한 중국인들을 배려해 중국어로 연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주 중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김영훈 목사
사 목사의 행적에 대해선 다음에 서술하기로 하고 김 목사의 행로를 좇아가 보자. 김 목사는 미주 한인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3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 한인청년 전명운에 이어 상항한국인감리교회 성도였던 장인환이 오클랜드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주미 일본영사와 함께 차에서 내린 스티븐스를 저격했다. 스티븐스는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고문에 임명된 뒤 일본의 한국 침략행위를 왜곡하는 데 앞장섰다. ‘장인환 전명운 의사’ 의거의 영향으로 재미 한인단체(공립협회와 합성협회 간) 통합이 이뤄지면서 국민회(國民會)가 조직됐다. 상항한국인감리교회 이대위 목사가 양회 합동 발기인이 되는 등 상항한인교회 인사들이 국민회 탄생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김 목사는 1918년도 국민회 북미지방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새로운 임원이 됐다. 샌프란시스코 지방회는 1917년 12월 8일 선거를 통해 다음 해 임원을 선출했다. 그해 신한민보 12월 20일자에 따르면 회장 임정구, 부회장 김원서, 총무 하상옥, 서기 리살음, 재무 강천명, 학무원 백일규, 법무원 김영훈, 실업부원 황사선, 구제원 송찬균, 대의원 홍언 등이었다. 김 목사는 다음 해 1월 2일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 및 부회장 취임식에서 대표기도를 인도했다. 그는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 이대위 목사의 요청으로 총회 법무원을 맡게 돼 1월 20일 지방회 법무원 직책을 사임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소년서회를 넘겨받아 서회 경영에도 나섰다. 소년서회 주인은 원래 주원씨였으나 그가 1월 19일 귀국하게 되면서 김 목사가 소년서회의 상호와 소유 서적을 모두 넘겨받았다. 당시 소년서회는 샌프란시스코 매손 스트리트 1242에 있었다. 1918년 9월 5일자 신한민보의 ‘소년서회 광고’를 보면 서회가 판매하던 일부 서적을 알 수 있다. ‘헌법요의, 외교통의, 간명교육학, 말의 소리, 웅변법, 말의 소담, 산술신서, 국가사상학, 대한역사, 초등식물학, 고등산학신편, 춘향전, 주역, 대학, 논어, 맹자, 중용, 해당화, 공산명월, 신약소본, 찬송가.’ 김 목사는 서회를 운영하면서 맨티카 예배당 건축헌금 3원(신한민보 1918년 9월 5일), 국민의무금 5원(신한민보 1918년 10월 3일)을 납부했다. 그러나 그해 11월까지 소년서회를 운영하다 서적 사업 전부를 흥사단 본부로 매각, 처리했다. 새크라멘토 교회 사역에 집중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인다.
김 목사는 새크라멘토에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합류했다. 국민회 중앙총회는 그에게 중국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직책을 맡겼다. 이에 그는 우리 민족의 활동과 중국 및 동양의 관계를 들어 강하면서도 간결한 중국어 문장을 작성, 샌프란시스코 지방 중국신문인 ‘중서일보’ 1919년 4월 30일자에 발표했다. 김 목사는 샌프란시스코 거주 중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을 도와 달라고 호소한 뒤 6월 7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새크라멘토 거주 중국인들과의 교섭을 맡았다. 6월 15일 새크라멘토 지방 중화회당(中華會堂·현재 중화회관)에서 열린 대회에서 그는 중국어로 연설했다. 취재팀은 혹시 김 목사의 연설 관련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해서 21일 새크라멘토 중화회관을 찾아갔다. 하지만 문이 닫혀 있어 내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김 목사는 중화회당에서 100여명의 중국인이 모인 1919년 6월 15일 행사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고 연설 뒤엔 중국인 각 단체 직원들의 요청으로 중화루(中華樓) 만찬에 참석, 마침내 중국인들로부터 국민회 활동을 돕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김 목사는 1921년 10월에는 국민회 북미총회 총회장 후보가 됐다. 총회장 후보가 되기 전인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 그는 청원서를 보냈다. 이때 회의록을 보면 김익두 목사는 “지금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김영훈씨가 중국 산둥으로 다시 보내 주시기를 바란다는 청원을 전도부로 보냈다”고 밝혔다.
샌프란시스코·새크라멘토=글·사진 함태경 기자, 김교철 목사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