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0) 남산 안기부 요원들 “당신, 간첩 아닙니까?”

입력 2011-10-27 20:46


나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간첩으로 오인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카메라와 필름을 잔뜩 가지고 입국한 뒤 청계천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이곳저곳을 마구 찍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한국에 카메라도 필름도 흔하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인지 내 뒤에는 항상 ‘남산 사람’(중앙정보부 요원)이 따라붙었다. 필름 소유 상한선은 10통이었다. 10통이 넘으면 남산 사람이 뺏어갔다. 그러면서 남산 사람은 내가 입국할 때마다 위스키, 크림 등을 달라고 했다. 때로는 TV까지 갖다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예전 일본 경찰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그들도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일제의 속죄를 위해서라도, 그들의 생활을 위해서라도 돕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남산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기에 무조건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의구심은 버리지 않았다. 당시 한국기독교장로회 군목 중에 동경신학대 대학원 출신이 한 명 있었다. 한국의 육군 보안사는 그 사람이 북한 공작원 여자에게 넘어갔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보안사는 그 사람과 관련해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 목사에겐 부인과 딸이 2명 있었다. 나는 보안사 요원들을 만나 한 호텔에서 24시간 꼬박 조사를 받았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설령 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가족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사를 받으며 엄청난 협박 속에 생명의 위협마저 느꼈다. ‘한국을 계속 도울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도 밀려왔다. 그 위협과 회의감 앞에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한국에 대한 속죄의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서울에 있는 동안 주로 호텔에 머물렀다. 당시는 밤 12시 통행금지가 있었다. 자정이 약간 지났을 때 누군가 호텔 방문을 노크했다. 누군가 싶어 문을 여니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방으로 쑥 들어왔다. 당시는 일본 사람들 사이에 ‘기생파티’가 유행이었다. 한 번에 수백명씩 대한항공을 타고 한국으로 와서 술집 여자들과 놀고 가는 게 유행이었다. 아마 그 여자는 나도 그런 일본인 중의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깜짝 놀라 호텔 1층 프런트로 내려갔다. 모르는 여자가 내 방에 왔으니 당장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랬더니 호텔 직원은 웃으면서 “그 여자는 당신의 한국어회화 선생이다”라고 얘기했다. 기가 막혔다. 밤 12시가 넘었으니 쫓아낼 수도 없었다. 여자는 샤워를 하고 나더니 “안녕”이라고 내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나는 돈과 여권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여자 문제로 발목이 잡힌 민주화 인사들 생각도 났다. 그 여자는 나중에 내게 “당신, 남자 맞습니까?”라고 화난 표정으로 물었지만 나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호텔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잠을 자는 동안 그 여자는 큰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을 잤다.

다음 날 나는 그 여자에게 돈을 주기에 앞서 붙잡고 몇 마디 했다. “나는 당신을 꾸짖을 수가 없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빨리 이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아라. 하나님이 당신을 지켜주실 것이다.” 이런 일은 나중에도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그러면서 나는 그것이 남한 정보기관의 올가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악마의 유혹은 계속됐지만 나는 그 유혹에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