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신동희] 국내 융합학문의 현실

입력 2011-10-26 17:46


스티브 잡스 사후 융합에 대한 관심이 더욱 더 높아지며, 과연 한국에서도 그와 같은 창의적 인재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오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융합이 대학가의 새로운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융합학과 개설도 급증하고 있다. 잡스 같은 창의적 인재를 요구하는 시대적 필요에 따라 대학들도 학문 간 벽을 허물고 신성장 동력의 견인차 역할을 할 새로운 학문 창출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추세에 따라 최근 3∼4년 사이 융복합 관련 학과가 전국에 40개 이상 생겨났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세계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 육성사업’(WCU)도 융합 전공을 창출해 국내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려는 목표에서 시작됐다.

준비없이 통폐합하면 안 돼

하지만 시대적 요구에 따라 급증한 융복합 학과는 그 속도와 숫자만큼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충분한 준비와 체계 없이 학과를 통폐합하면서 마찰음을 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학과 명칭만 바뀌고 배우는 커리큘럼은 비슷하거나 별 차이 없는 ‘무늬만 융합학과’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또 학과 이기주의로 인해 교수들 간 융화와 융합이 어려워 불협화음도 발생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융합학문 관련 학과가 해체 위기에 놓이거나 대학 비인기 학과의 통폐합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융합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대학의 구조조정을 위한 좋은 구실로 악용되기 때문에 융합에 대한 학계의 거부감이 큰 것 같다.

필자가 지난 3년간 융합학과 전임교수로서 느낀 것은 국내 융합학과에는 지속 발전 가능한 체계나 시스템이 전무하거나 미미하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국내 융합 학문은 교과부, 지식경제부, 문화체육관광부 같은 정부의 하향식 지원을 받아 어렵게 연명하는 수준이다. WCU를 통해 생겨난 20여개 새 융합 프로그램들의 미래는 사업 종료일인 2013년 후에는 불투명한 것이 현실이다.

국내에서 융합 학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산업적·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외형적·피상적 융합을 통해 무리한 속도를 내기보다 교육 커리큘럼과 우수한 전임교원 확보 등 실질적 내실을 먼저 다져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안정적 시스템과 전반적 산업·사회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새로운 융합 학문들이 대학, 민간 연구소, 기업들을 기반으로 상향식으로 생겨나고 새 학문들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주정부나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방법으로 수십 년에 걸쳐 생겨났다. 이렇게 수십 년에 걸쳐 생겨난 신생 융합 학문을 한국에서는 불과 4∼5년에 그 가능성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다. 카네기멜론대학의 ETC(Entertainment Technology Center)나 미국 MIT 미디어렙과 같은 확립된 융합 연구기관들도 단기간에 성과를 이룬 것이 아니라 10∼20년에 걸쳐 이질적 학제들을 융화하며 다양한 난관을 넘어서기 위한 지속적 노력의 결과로 오늘날 세계적인 융합 기관으로 탄생했다.

지속발전 시스템 갖춰야

이질적 분야의 만남이 단순한 산술적 결합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숙성 과정을 필요로 하듯 일정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한국의 융합 학문도 이러한 산고를 겪을 것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학제적 전통이 강하고 사회적 인식이 부족하며 산업적 구조가 특이한 상황에서는 서구의 수십 년 걸린 시간보다 시간이 더 걸리면 걸렸지 짧지는 않을 것이다. 중장기적으로 정부 지원 없이도 자생력을 갖춘 융합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융합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정부, 산업계, 학계 모두에 요구된다.

신동희 성균관대 교수 WCU 융합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