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고향] (4) 이성희 연동교회 목사의 대구
입력 2011-10-26 17:30
6·25 포화 속 교회 건축… 선친 굳센 신앙의 뿌리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칠곡군의 옥계동이라는 작은 마을이다. 선친 이상근 목사님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능라도교회에서 목회하셨다. 평양에서 나보다 두 살 많은 형을 낳아 돌배기 형을 데리고 와 잠시 목회한 곳이 구슬 같은 물이 흐르는 옥계(玉溪) 마을이다.
어머니는 시골교회 작은 사택에서 혼자 진통 끝에 나를 낳으셨다. 너무 힘이 들어 쌀가마니를 붙들고 나를 낳으셨단다. 그래서 어머니는 “쥐띠 해에 쌀가마니를 붙잡고 낳았으니 넌 굶지는 않을 거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시곤 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대구대봉교회를 개척하시고 대구에서의 삶이 시작되어 나의 기억 속에는 옥계동에 관한 추억이 별로 없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옥계동교회에 설교할 일이 있어 가신다기에 기를 쓰고 따라나서 내가 태어난 마을, 태어난 그 방을 다시 가보는 기쁨을 잠시 누렸을 뿐이다.
내 머릿속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대구대봉교회와 대구제일교회이다. 아버지께서 시무하시던 그 교회들이 나의 고향이며 나의 교회가 되었다. 아버지가 대구대봉교회를 개척하시고 열정적으로 목회를 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많은 교인과 이웃이 피란 갔지만 우리 가족은 교회를 지켰다. 서로 먼저 가겠다는 와중에 아버지는 다른 이웃에게 피란 차량까지 양보하셨다. 그런데 낙동강 방어선에서 인민군이 남하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우리 가족에게는 피란을 가지 않은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아버지는 당시 대구대봉교회 건축을 위해 건축헌금을 준비 중이셨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서 건축 자체가 무위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쓸모없이 되고, 화폐가 휴지조각이 될 지경에 최선의 방법은 건축자재를 사서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었다고 하셨다. 전쟁이 한창이고 포화소리가 그치지 않는데, 교회를 짓고 있으니 이를 보는 사람들은 “젊은 목사가 전쟁 통에 정신 이상이 되었다”고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정전이 되고 다시 돌아온 피란민들은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젊은 목사가 예언의 능력이 있다.”
그 소문이 갑자기 퍼지면서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어린 나는 그때 하늘을 나는 전투기들을 따라가며 “야, 뱅기다(비행기를 그렇게 불렀다)”라고 하면서 교회 마당을 뛰어다닌 기억이 뚜렷하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던 때 아버지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선교부의 장학금으로 유학생활을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홀로 남아 돌이 막 지난 누이까지 사남매인 우리 형제를 돌보셨다. 아무런 생활대책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용감하게 아버지를 미국으로 보내셨다.
우리 가족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끼니에서부터 모든 것을 염려해야 할 처지였다. 내가 필요한 것, 갖고 싶은 것이 있어 사달라고 하면 어머니는 늘 “아버지 오시면 사줄게” “아버지가 미국에서 가지고 오실 거야”라고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막상 한국에 오실 때 책만 잔뜩 가지고 오셨다. 내가 바라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의 대구제일교회가 자리한 곳은 내가 어릴 때 뛰어놀던 놀이터였다. 당시에는 대구신학교 자리였는데 영남신학대로 승격해 경산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그 자리에 교회가 들어섰다. 그때 대구시에 큰 불이 났다.
나는 동산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 불 구경을 하다 떨어질 뻔하였다. 놀란 가슴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경기’라는 병으로 심하게 앓기도 했다. 또 병원에서는 ‘소아마비’ 증세도 있다고 했다. 이로 인해 나는 오랜 동안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경기도 소아마비도 잘 치료가 되어 지금은 아무런 증세가 없지만, 그때 어머니는 홀로 마음의 고통을 감당하셨다. 유학 중인 아버지는 멀리에서 아들의 아픔을 지켜보고만 계셨다. 그분은 편지를 통해 사랑으로 나를 감싸안아 주셨다. 58년 ‘사랑하는 아들 성희에게’로 시작되는 그 장문의 편지를 지금도 나는 간직하고 있다. 가끔 목회하다 힘들고 지칠 때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읽어보곤 한다. 그러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새록새록 새 힘이 솟아오른다.
아버지는 항상 시계처럼 저녁 9시에 주무시고 새벽 3시에 일어나셨다. 3시에 일어나면 평생의 작업이었던 성경주해를 쓰시는 일을 하셨다. 잠시 글을 쓰시다가 새벽기도회를 다녀오시고, 아침 식사를 하시고는 교회에 가셨다. 그리고 점심때가 되면 집에 오셔서 식사를 하시고 심방이나 그 외의 일을 하셨다. 교회의 업무와 설교준비를 하시는 일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주해나 집필로 보내셨다. 아버지의 생활 관습은 그대로 나에게 전해졌다.
나는 대구제일교회에서 고등학교 시절까지를 지냈다. 대구와 제일교회는 나의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장식한다. 그 후 서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 유학 시절을 보낸 후 지금까지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대구를 떠나온 시간이 대구에서 산 시간보다 몇 배나 더 긴 세월이지만 대구와 제일교회는 내 생애에서 지울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며 나를 나 되게 만든 토양이다.
왜냐하면 내가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한 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나를 목회자의 길로 인도한 곳이 대구제일교회이며, 나의 모든 신앙적 기틀의 모양새를 만든 곳 또한 그곳이기 때문이다. 내 생애에 가장 소중한 것들, 내 영혼에 가장 요긴한 양식들을 채워준 내 고향은 단지 내 육체의 고향만이 아니라 내 신앙의 뿌리를 든든하게 키워낸 영혼의 못자리이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