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8) 청계천은 내 신앙의 최고 스승이자 신학교
입력 2011-10-25 17:51
1974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됐다. 입국도 힘들었고, 한국에서의 활동도 쉽지 않았다. 그해 9월 나는 김진홍 목사의 안내로 겨우 청계천 빈민가를 심방할 수 있었다. 한 집을 찾았는데 실내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방은 창문이 없어 사방이 꽉 막혀 있었다. 방에서는 ‘우우우’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캄캄한 방에 조금 앉아 있으니 차츰 실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좁은 방에 한 소녀가 대각선으로 누워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엄마는 같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안돼 서 있어야 했다. 엄마는 무당집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김 목사는 갑자기 여자 아이의 치마를 확 들췄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안 보려 했지만 결국 그 끔찍한 장면은 기어이 내 눈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소녀의 옆구리 밑과 무릎 부근에는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파리 떼가 까맣게 소녀의 하얀 뼈를 덮고 있었다. ‘우우우’는 다름 아닌 파리 떼가 소녀를 공격하는 소리였다. 파리 떼가 소녀의 다리에 알을 낳았고, 구더기가 생기고 그 구더기가 살을 파먹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난 이거야말로 생지옥이라고 생각했다. 김 목사는 자신의 손으로 구더기를 하나하나 다 잡아냈다. 자꾸만 살 속으로 파고드는 구더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손에 침을 바르기도 했다. 나도 그 광경을 눈뜨고 볼 수만은 없었다. 손에 침을 바르고 김 목사가 하는 대로 구더기를 한 마리 한 마리 끄집어냈다. 잡으려고 할수록 자꾸만 살 속으로 파고드는 구더기를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소녀에게 영어로 “하우 아 유?”라고 물었지만 소녀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소녀의 허연 눈동자가 옆으로 쏠린 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죽어가는 가련한 소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속으로 또 다시 울부짖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난 거듭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결국 두 달 뒤 죽고 말았다. 그 소녀의 죽음, 눈동자는 나에게 숱한 질문을 던졌다. 평생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 어떤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인생인가. 예수님은 그 소녀의 눈을 통해 나를 보셨던 것이다. 그 소녀를 통해 내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 소녀의 눈동자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 소녀의 눈동자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모습이 한없이 작아진다.
사람들은 보통 날강도나 깡패, 매춘부를 싫어한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대상들이다. 그 소녀가 나를 다른 각도로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했다. 나는 힘없고 간절했던 그 소녀의 눈망울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 신촌이나 서울역의 매춘부들을 감싸 안을 수 있었다. 그 소녀는 나의 스승이었다.
지난 30∼40년 동안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뜻을 계속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건지 조금씩 알게 됐다. 누운 채 나를 바라보던 소녀의 눈을 통해,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매춘부들의 눈을 통해, 깡패들의 얼굴을 통해서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내신 성경 교사들이었다. 나에게 최고의 신학교는 청계천이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