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염성덕] 경제부처 首長의 자격

입력 2011-10-24 17:39


국가부도가 우려되던 1997년 하반기 강경식 재정경제원(재경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 펀더멘털이 튼실하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기자회견은 물론 외국 금융기관 관계자들을 만날 때도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을 거론하며 외화 유출 자제를 당부했다. 그러나 외국계 자금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한국 외환보유액은 급속도로 고갈됐다.

재경원을 출입하던 기자는 그해 11월 18일 본보 1면에 ‘IMF에 수백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신청한다’는 톱기사와 3면에 해설기사를 실었다. 당시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은 반박자료를 내지 말라고 한 반면 공보관은 보도를 부인하는 자료를 언론에 뿌렸다. 하지만 신임 임창렬 재경원 장관은 불과 사흘 후인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키로 했다”며 정부 입장을 발표했다.

부적절한 발언·처신 삼가고

국내 굴지 기업들의 연쇄 부도 여파와 불안한 국내외 금융시장 실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재경원 장관 등이 “외환위기가 임박했다”는 것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실을 왜곡하면 안 된다. 장관들, 그중에서도 경제부처 장관들은 논리적으로 정책을 설명하고, 언행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야 국내외 경제주체들이 우리 정부를 신뢰한다.

유럽과 미국의 재정위기로 세계경제가 휘청거리는 올해 하반기에도 금융당국은 “우리 펀더멘털은 양호하다”고 주장한다. 경제지표를 보면 외환위기 때보다 경제 체질이 훨씬 강해진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후폭풍을 몰고 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금융당국은 만반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금융당국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금융위원회 김석동 위원장의 최근 카드 수수료 발언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소액결제의 (신용카드) 의무수납을 폐지 또는 완화하는 걸 검토할 시기가 왔다”고 말했다가 여론의 ‘융단폭격’을 받았다. 탁상공론의 전형을 보여준 건지, 카드업계를 대변하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소비자들은 아우성을 쳤고, 세수 감소와 세원 관리를 우려한 국세청까지 반대했다. 김 위원장이 파장에 대해 종합적 판단을 했다면 그렇게 경솔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번 논란에 관한 한 낙제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

지식경제부 최중경 장관은 어떤가. 최 장관은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3개월째 기름값 변동 원인을 찾고 있지만 미로에서 헤매고 있다. 기름값이 비싼 주유소 180여곳의 장부도 조사했지만 아직 폭리 구조를 밝히지 못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도 잡지 못하고, 전력대란까지 초래한 장관이라는 불명예를 얻고 퇴진하게 된 것이다.

정책 신뢰·효율성 높여야

힘깨나 있는 부처나 기관 간의 힘겨루기도 목불인견이다. 지난 19일 금융감독원 1층 로비에서 금감원 직원 300여명이 집회를 열었다. “관치(官治) 강화 웬 말이냐”라는 구호까지 나왔다. 금융소비자보호원(금소원) 설립을 위한 법률안 제정 과정에서 금융위가 금소원장의 임명권을 갖고, 금감원의 금융기관 징계권을 약화하려고 하자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다. 김석동 위원장이 “합의안을 만들라”고 지시했지만 중재가 될지는 미지수다.

금융위나 금감원이 금소원의 설립 취지를 외면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저축은행 파동으로 금융위나 금감원에 대한 불신이 고조에 달했을 때 금융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나온 대책의 하나가 금소원 설립이었다. 그렇다면 금소원은 대통령 또는 총리실 직속이거나 독립기관으로 만드는 것이 순리다.

경제 부처 수장들의 부적절한 언행과 무능, 부처 간 밥그릇 싸움은 국민과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