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진홍] 10·26 사태

입력 2011-10-24 17:31

영화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호신용으로 갖고 다닌 권총은 독일제 발터(Walther) PPK다. 본드는 영국 비밀정보국(MI6)의 상관인 M의 권유에 따라 이 권총을 사용하게 된다. 발터의 영어식 발음은 ‘월터’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에서 발터 PPK 총성이 울렸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박정희 대통령과 경호실장 차지철을 잇달아 저격한 것이다. 이때 김재규가 사용한 총이 길이 15.5㎝, 무게 570g, 7연발 32구경 발터 PPK다. 독일제 권총이 18년 장기집권 체제의 종막을 알린 셈이다.

김재규는 이듬해 5월 24일 서대문의 서울구치소 교수대에서 최후를 맞기에 앞서 진행된 재판과정에서 자신을 “혁명가”라고 표현했다.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더 많은 국민이 희생되는 것을 막고, 독재국가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박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것이 그의 진술 요지다. 그래서인지 경기도 광주시 우포읍 삼성공원 내에 있는 그의 묘 앞에 설치된 추모비는 ‘의사(義士) 김재규’란 문구가 포함돼 있다.

반면 김재규를 대역죄인으로 보는 쪽도 적지 않다. 계획적으로 대통령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한 사건이라는 시각이다. 차지철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린 김재규의 우발적 범행이라는 분석도 여전하다. 아울러 미국이 76년부터 한국 내 유명 인사들을 상대로 ‘박정희가 없는 한국’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는 것 등을 근거로 한 ‘미국 중앙정보부 사주설’도 말끔하게 정리된 상태가 아니다. 10·26 사태가 과거가 아니라 아직까지 현재로 남아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까닭이다.

가수 심수봉씨와 함께 궁정동 안가 현장에 있었던 신재순씨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법정에서 그같이 얘기한 것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강압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김재규가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얘기했다는 법정 육성녹음이 공개된 적이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아리송하다.

10·26 사태에 대한 평가 역시 엇갈린다. 12·12쿠데타로 이어져 민주화를 크게 후퇴시켰다는 지적이 있는가 하면 5·18민주화운동과 6·10항쟁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지는 내일은 10·26 사태가 일어난 지 32년이 되는 날이다. 정확한 진상이나 발생 원인은 언제쯤 명확하게 밝혀질까.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