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7) 동경하던 나라 한국서 1968년 드디어 초청장이…
입력 2011-10-24 20:54
나는 1957년 미국 바이올라대학에 다닐 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수를 받으면서 복음의 황무지와 같은 일본이나 선교지 뉴기니에 가서 복음을 전할까 생각도 했다. 남미 에콰도르에 기독교방송국이 있었는데 거기서 방송국 담당자가 되어 달라는 말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당시 안수를 해주던 목사는 내게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고 얘기했다. 그것은 내가 켄터키성서대학에서 배운 것과 꼭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특정 교단에 소속돼 있지 않은 것도 조직이나 돈으로부터 독립해 마음껏 사람들을 섬기고 싶은 생각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독립 복음전도자’인 내 신분이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할 수가 없다.
나는 페퍼다인대학을 거쳐 1961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일본에서 목회를 하면서도 늘 한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조선인들을 보고 경험했던 일, 김오남씨와의 만남 등을 떠올리며 어떻게 해서라도 한국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가 오지 않았다.
1968년 여름, 마침 내가 아는 한국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세복씨로부터 초청장이 왔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테네시주의 한 교회에 요청해서 김씨를 미국 교회의 목회훈련생 자격으로 초청해 영주권을 얻게 한 적이 있다. 당시는 한국인의 외국 유학도 일본만큼이나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를 초청했을 당시 김씨는 당시 서울 그리스도대 동문회장을 맡고 있었다. 김씨는 나에게 ‘일본 교회 목회자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 달라’고 공식 초청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안 가고 나 혼자만 가게 되었다.
김씨의 안내로 수양회도 참석하고, 또 청계천 빈민선교 현장도 탐방하게 되었다.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된 제정구씨도 만났고, 김진홍(두레교회) 목사와도 교제하게 되었다. 청계천은 서울 도심 개발로 밀려난 사람들이 한꺼번에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썩은 냄새가 나는 청계천변에서 판잣집이나 땅굴을 파고 사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끔찍하다’는 느낌과 함께 일종의 소명의식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그때 이후로 1980년대 중반까지 50여 차례나 일본과 서울을 오가며 청계천 빈민사역을 돕고 해외에 알리는 사역을 했다.
한번은 청계천에서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경찰도 교회도 자살한 사람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경기도 남양주 활빈교회 몇 사람들과 함께 대나무에 끈을 매서 겨우 시체를 끌어냈다. 시체는 며칠을 물속에 있었는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눈이 튀어나와 있고, 배가 부풀어 올라 있었다. 사람들은 시체를 씻을 물도, 장사를 지낼 돈도 없다고 했다. 당시 물 20ℓ는 3주간의 임금과 맞먹었다. 어쩔 수 없이 내 돈으로 물을 사서 몸을 씻겼다.
그런데 장사를 지내려고 화장터에 갔더니 사망진단서가 없다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병원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화장터로 달려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누군가가 ‘여권에다가 일본돈 1만엔을 넣어서 의사에게 건네주면 사망진단서를 특급편으로 보내준다’고 귀띔해줬다. 얘기대로 했더니 사망진단서는 바로 그 다음 날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돈과 사망진단서, 여권을 넣어서 경찰에 갖다 줬더니 곧바로 사망확인서를 떼어줬다. 다시 시체를 리어카에 태워서 화장터로 가서 화장을 했지만 이번엔 묘가 없었다. 청계천 다리 위에서 그 뼛가루를 뿌리며 나는 부르짖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