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스위스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 (上)

입력 2011-10-24 18:05


“사순절 기간 육식 문제 없다” 신임 사제 발언 일파만파

1522년 사순절에 취리히 최초의 인쇄업자 크리스토프 프로사우어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모여 소시지를 먹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소시지를 먹은 일이 큰 사건이라니?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라 하겠지만, 당시에는 사순절 금식기간에 소시지를 먹는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왜 그런가? 사순절은 중세 가톨릭의 중요한 전통이었다.

사순절은 예수의 부활 전 40일간을 뜻한다. 이 기간은 신도들이 참회와 대속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건하게 맞이하기 위한 기간이다.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원래 사순절에는 기한이 없었다. 초기에는 사순절을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기 이전의 40시간으로 계산해 2, 3일만 지키면 되었다. 기한이 정해진 것은 325년 니케아공의회였다. 40일이라는 기간은 모세의 시나이 산 40일 금식과 엘리야의 호렙 산의 40일 금식, 특히 예수의 광야에서의 40일간의 금식 일수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사순절 기간은 교회마다 차이가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재위 590∼604) 때에 와서 사순절의 시작을 재(灰)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시작하여 40일을 엄격하게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왜 사순절을 알리는 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잡았는가? 기독교에서 재를 뿌리는 의식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구약성서를 보면 재를 뿌리는 행위는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 탄식을 상징한다. 그런데 재를 뿌리는 전통은 10세기 말까지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1091년 베네벤토의 주교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전체 교회에 권유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사순절 기간에 죄를 참회하는 행위는 재를 뿌리는 행위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 기간에는 철저한 단식이 행해졌다. 초창기에는 단식의 준수가 매우 엄격해서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저녁 무렵의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다. 물론 조류, 육류와 생선 심지어 달걀까지 금지되었다. 그러나 일상생활을 해야 하는 신도들은 지키기 힘든 규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식 규정은 상당히 완화되기 시작했다. 저녁식사 시간도 앞당겨졌고, 식사 외에 가벼운 간식도 허용되었다. 그리고 생선에 대한 금지도 해제되었다. 그러나 육식은 여전히 금지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넘어서면 안 될, 다시 말해 교회 전통이 무너질 수 있는 마지노선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통의 마지노선을 취리히의 일개 인쇄업자가 깨버린 것이다. 물론 소시지를 먹었던 프로사우어와 일행에게 종교적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밀려드는 일 때문에 업무가 과중해 육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변명해야 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측에서는 사순절의 금식 규례를 어긴 인쇄업자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자들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그로스 뮌스터 교회의 신임 사제도 함께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참석했지만 소시지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신임 사제는 소시지를 먹은 사람들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설교와 ‘음식물의 선택과 자유에 대하여’라는 저작을 통해 사순절에 육식을 금하는 것은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하나님이 주신 음식은 무엇이든 먹을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신임 사제의 주장은 이내 스위스 종교계에 파장을 몰고 왔다. 이미 이 젊은 사제는 그로스 뮌스터 교회에서 행한 참신하고도 뛰어난 설교로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이 신임 사제의 이름은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였다. 그는 이미 새로운 설교로 취리히에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취리히에서 그의 35번째 생일이 되는 날인 1519년 1월 1일에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설교를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했다. 당시에는 날마다 정해진 본문에 따라 설교를 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성서에 기초해서만 설교를 했다. 설교를 통해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강해하고, 베드로 전후서, 히브리서를 선택해 강해를 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겠지만, 성서를 직접 읽을 수 없는 당시 사람들로서는 대단한 일이었고 충격이었다. 한 목회자의 입을 통해 성서가 어떤 복음을 전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루터의 성서 번역과 뜻을 같이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물론 가톨릭교회가 반발했다.

츠빙글리는 1522년 7월 2일 뜻을 같이하는 다른 10명의 사제들과 콘스탄츠의 주교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복음을 설교할 자유와 사제들의 결혼할 자유를 간청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언급을 하겠지만, 이때 츠빙글리는 비밀리에 결혼을 한 상태였다. 물론 탄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취리히 의회는 츠빙글리 방식대로 성서에 기초한 설교를 인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성서적 설교를 했던 츠빙글리의 명백한 승리였다. 츠빙글리는 대성당 사제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1523년 1월 29일에 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토론회에 참석했다.

주제는 성서의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 토론회는 대중들 앞에서 신앙을 설명하고 옹호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토론회에서는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가 사용되었기에 종교개혁을 전파하는 주요한 매체이기도 했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95개 조 논박문에 비견할 만한 67개 결의를 토론회에서 제시했다. 이것은 청중들 앞에서 최초의 공개적인 가톨릭교회에 대한 논박이다. 콘스탄츠 주교의 대리인이자 츠빙글리의 적수였던 요한네스 파베르는 교회의 권위를 주장하며 설교 문제가 의회가 인가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설교는 성서의 권위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왜 가톨릭교회는 츠빙글리의 설교에 대해 반대한 것일까? 츠빙글리의 주장대로 설교가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성서에 근거해야 한다면 사순절에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은 그 근거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한 규정은 성서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황권, 사면권, 면죄부 등도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론회에서 스위스 의회는 츠빙글리의 설교가 성서적이며, 모든 사람들은 성서에 따라 설교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츠빙글리는 독일어로 된 67개 결의를 그해 7월에 출간했다. 이제 루터처럼, 츠빙글리도 67개 결의를 통해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의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