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국가들 ‘독일 딜레마’… 위기극복 지도국 떠올라 ‘反독일 정서’ 꿈틀
입력 2011-10-23 23:21
유럽이 ‘독일 딜레마’에 빠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독일은 수십년간 전쟁범죄 국가라는 낙인을 벗지 못했다. 독일은 유럽의 전주(錢主)가 될 순 있어도 지도자가 될 순 없었다.
하지만 유럽 몇몇 국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부채 위기에 내몰리면서 독일의 영향력은 경제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 이에 유럽 국가들이 독일이 내미는 사탕을 받을지 말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23일 보도했다.
긴축 재정에 대한 반대 시위가 연일 벌어지는 그리스에서 최근 한 시위대는 나치 군복을 입은 채 시위를 벌였다. 그리스가 독일 치하에 있다는 것을 비꼬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대선이 치러진 폴란드에서도 ‘독일은 다시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는 야당 측의 독일 비난 구호는 높은 지지를 얻었다.
독일도 유럽 내 이런 ‘안티(anti) 독일’ 분위기를 감지하고 몸을 숙이고 있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우리는 부채 위기를 겪는 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결정할 때 구제 방법과 규모만을 생각한다”며 “정치상황은 언급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독일은 2차대전 이후 60년 넘게 유럽 내 정치적 문제는 프랑스와 영국에 맡긴 채 몸을 낮춰왔다. 자칫 잘못하면 전쟁범죄국이라는 비난에 시달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마르크화의 안정적 통화체계를 포기하고 유로존에 가입한 것도 다른 국가들의 눈치를 본 결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현재 유럽 국가들의 재정 여건을 살펴볼 때 독일이 없다면 유로존 붕괴는 시간문제다. 독일의 경제 규모는 3조3000억 달러 수준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2배에 달한다.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을 위한 구제비용도 유럽 국가 중 최다인 2900억 달러를 내놓았다. 독일 은행들은 프랑스에 비해 그리스 국채에 대한 위험 부담도 덜하다. 부채 위기에 시달리는 유럽 국가들의 구제 여부는 시쳇말로 독일의 결정에 달린 상황이다.
조슈카 피셔 독일 전 외무장관은 “유럽 국가들은 독일이 안 움직이면 유로존이 망할까 걱정이고, 독일이 움직이면 지배력이 강화될까 걱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