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6) 美유학 교훈 ‘사람을 섬김으로써 주를 사랑하라’
입력 2011-10-23 19:22
집안도 어려웠지만 수의과대학에서도 별로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다. 교수는 군의(軍醫)로 갓 제대한 이였다. 모든 게 군대식이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라 실험용 동물이 거의 없었다. 동네를 찾아다니며 개를 훔쳐오는 게 일이었다. 마취약이 없어서 개를 두들겨 패서 살아 있는 채로 해부를 했다. 학교 다닐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그때 마침 한 선교사가 내게 “미국 가서 성경공부하고 오지 않을래?”라고 물었다. 당시는 일본 사람이 외국 유학 가는 게 불가능했다. 겨우 비즈니스맨 정도만 정부 허락을 받아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선교사의 추천과 후원으로 미국행 길이 열렸다.
고베에서 미국행 화물선에 올랐다. 배는 너무나 지저분했다. 어쨌든 40일간 그 배를 타고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한 뒤 다시 기나긴 버스 여정을 거쳐 켄터키성서대학(남동부 기독대학의 전신)에 도착했다. 유학생활은 내 생각과는 딴판이었다. 돈도 없었고 말도 안 통했다. 주말이면 친구들은 다 놀러나갔지만 나는 혼자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주말에는 식사도 나오지 않았다. 나갈 수 있는 차도 없었다. 혼자서 기숙사에 남아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밖에 없었다.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중엔 영어사전이 다 닳을 정도였다.
어느 날 나를 켄터키성서대학에 추천해 준 선교사가 학교로 찾아왔다. 그 선교사는 “치과대학에 가면 선교의 길이 얼마든지 열린다”며 치과대학 입학을 종용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자 그 선교사는 후원을 끊어버렸다. 심지어 자기가 대준 뱃삯까지 다 내놓으라고 했다. 돈이 없었기에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더 이상 돈을 대줄 사람이 없으니 학교를 다니는 것도 불가능했다. 정말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때 프랑코 마리노라는 교수가 내 기숙사방에 들어왔다. 주말인데도 나가지 않고 혼자 있는 모습이 이상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 기숙사 방을 찾아온 백인은 그 교수가 유일했다. 그는 내게 이런저런 것을 물어봤다. 예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얼마 후 마리노 교수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해줬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걸 경험했다. 마치 큰 망치로 얻어맞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내게도 분명한 믿음이 생겼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학비 문제는 마침 그 교수의 소개로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던 자녀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내 스폰서가 돼 비자연장 문제까지 해결해줬다. 또 다른 장로 한 명은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말라면서 매달 나에게 용돈을 조금씩 넣어주었다. 학교 등록금도 그런 손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난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나중엔 과 수석도 했다.
내가 켄터키성서대학에서 배운 것은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이것을 평생 실천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했다. 이것이 내게는 굉장한 도전과 자극을 주었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까를 생각하기보다는 내 인생을 비관하며 죽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맡기셨던 것처럼 아픔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주는 것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