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학자 백소영이 만난 사람] ‘자유’를 좇는 신학자, 서광선

입력 2011-10-23 17:41


“세상은 일곱 빛깔이 함께 해야 아름다워지죠”

분주한 마음과 재촉하는 발걸음으로 일주일에 서너 번은 지나쳤던 이화여대 후문 언덕 길.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닿는 은사님의 연구실이 지척에 있다는 걸 어찌 이제야 알았을까? 스무 살, 처음으로 신학의 문을 두드리던 1987년 첫 학기 첫 수업이 바로 서광선 교수의 ‘신앙과 신학’이었다. 영원히 나이 들지 않으실 것만 같았던 그날의 스승님이 오늘은 팔순의 부드러운 미소로 맞아주신다. 스물네 해 만이다. 소심함에 머리를 푹 숙이고 필기만 열심히 하던 어린 제자는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렸다. 겨우 이만큼 사는 동안 허덕였던 제자는 팔십 해의 인생과 신학 여정이 마냥 궁금하다. 저 평화롭고 단단한 웃음의 비밀 말이다.

“너의 할아버지는 널 안아보지도 못하고 순교하셨는데, 난 이렇게 손자를 안아볼 수 있다는 것, 감사하고 감격스럽다. 이게 전쟁이 없어 가능한 것 아니겠니?”

첫 손자를 품에 안고 ‘할아버지’ 서광선 선생이 한 말이었다. 전쟁. 그의 생애는 온통 전쟁의 연속이었다. 일제치하 만주에서, 한국전쟁 당시에 그가 본 것은 폭력과 죽음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 잔인한 시절에 빼앗겼다. 선생은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하늘 푸르고 맑던 그곳에서 비만 그치면 영롱하게 떠오르던 무지개를 보며 ‘소년’ 서광선은 꿈을 꾸었다.

‘이 작고 답답한 시골을 떠나야지. 가난하고 힘든 촌구석을 벗어나 저 무지개를 좇아 도회지로 갈 거야.’ 그럴 만도 했다. 가난한 목사였던 아버지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까닭에 교회에서 쫓겨나 여기저기 떠돌며 장사를, 개척교회를 하며 고생하셨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영양실조에 폐병까지 걸렸고, 선생이 겨우 열세 살이던 해에 돌아가셨다. 가난이 싫었고 고집스런 아버지가 미웠다. ‘난 절대로 목사는 안 될 테야. 의사가 되어서 목회자 가족들을 평생 공짜로 고쳐주겠어.’ 소년의 꿈은 그랬다. 그것이 첫 무지개였다.

‘소년’ 서광선에게 아버지는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삶의 기조를, 신앙의 뼈대를 형성해준 분이셨다. 절대 신앙을 붙들고 타협할 줄 모르던 분. 하여 일제시대에도 공산치하에서도 모진 고초를 당하셨던 분. 결국은 6·25 직후 대동강가에서 손발 묶여 총살당하셨다.

아버지는 평소 선생에게 그리 말씀하셨다. “성경은 질문하는 게 아니야. 읽고 믿기만 하는 거야.” 일본말을 모르시던 아버지를 위해 일본어 성서주석을 읽고 번역도 해 드리면서 선생은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고, 그럴 때마다 호된 호통이 이어졌다. “이상하잖아요? 아버지. 모세오경을 모세가 썼는데 어떻게 자기가 죽은 뒤 이야기까지 쓸 수가 있어요?” 처음 따귀를 맞은 까닭이었다. 묻지 못하게 하는 아버지가, 자유의 제한이 싫었다. 하여 선생은 늘 ‘자유’를 갈망했다. 마음껏 질문할 자유, 창조적 신앙을 고백할 자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인간, 자율적 인간으로 살아갈 자유. 신학을 공부하며 비로소 선생은 구원의 참뜻이 해방이요 자유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버지는 ‘닮고 싶은 신앙인’이었다. 진보적 신학을 하던 선생이 나이 오십이 되어 예장 목사가 될 줄은, ‘현대교회’ 담임목회자로 섬기게 될 줄은 선생 자신도 몰랐던 일이었다. 강직하셨던 아버지. 충분히 남하하실 수 있는 상황에서도 신앙을 굽힌 바 없이 교인들 곁을 지키시다 순교하신 분. 올곧은 신앙에 기초한 아버지의 저항정신은 선생의 뼛속까지 스며들었었나 보다. 1980년까지도 평신도였던 그가 아버지의 순교정신을 이어받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해직되면서였다. 민주와 인권을 위해 동료교수, 학생들과 함께 시대의 불의에 저항한 결과가 그랬다. 그때 비로소 ‘아버지의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이어받고 싶은 것,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어주고 싶은 것, 그것은 바로 ‘옳음을 위해 저항하는 정신’이요 ‘순교의 정신’이었다.

선생은 여전히 ‘무지개를 좇는’ 소년이다. 그 무지개는 이제 개인의 자유를 넘어 민족과 전 인류, 만물의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하여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노예’의 삶을 선택하지 말라 당부한다. ‘자유인으로서 창조적으로 자신을 살리고 세상을 바꾸라’고 부탁한다. 학교도, 교회도 질문을 허용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자유인을 길러내라 조언한다.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게, 그게 제일 무섭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선생의 아들이 언젠가 그리 말했다지만 실은 자유는 부담감이다. 내 선택에 내가 책임짐이다. 그러나 선생이 말하는 ‘자유’는 그리스도가 주신 것, 신앙에서 오는 자유다. 그래서 ‘내가 비록 갇혀 있으나 내 영혼은 자유롭다’는 바울과 루터의 신앙고백은 옳은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종이 되는 선택을 하는 자유’가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진 자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역설이요, 실존적 상황이다. 이 역설로 인해 때로는 죄를 짓고 좌절하지만, 어려움을 이기고 난 뒤에 올 약속과 희망의 상징 ‘무지개’가 있기에 오늘도 ‘지금 이 자리’를 용감하게 살아내는 것이다.

선생에게 무지개는 전쟁 없는 평화의 상징, 화해의 상징이기도 하다. 선생은 남과 북이 함께 무지개를 쳐다보는 날을 그린다. 노교수는 자신의 세대가 ‘피 흘린 폭력의 세대’였음을 자성하며 ‘조용히 젊은 세대가 이룰 평화통일을 위해 꿈을 꾸어주는 것이 우리 몫’이라고 그리 고백한다. 선생에게 무지개는 또한 공존, 상생, 협력의 상징이다. 일곱 빛깔이 함께해야 아름다운 빛을 내는 법 아니던가! 파란색만, 빨간색만 고집하며 그 외의 다른 색들은 있어선 안 된다고 배척하는 동일성의 주장은 폭력이다. 이주노동자나 결혼이민자들인 동남아시아 사람들과 같이 사는 연습을 하는 오늘날, 선생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수자를 품고 다름을 품어내는 모습을 꿈꿔본다.

“손자 손녀들에게 물려줄 세계를 돌보는 것”(‘무지개를 좇아서’ 155쪽)이 할아버지의 임무라 그리 믿는 서 교수! 하여 선생은 오늘도 할 일이 많은 바쁜 ‘할아버지’다.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교수>

서광선 교수는

1931년 평북 강계 출생. 미국 로키마운틴대학과 일리노이주립대학교에서 철학,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원과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64∼96년 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80년 해직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현대교회를 잠시 시무했다. 94∼98년 세계YMCA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대동강 건너, 요단강 넘어’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반성’ ‘종교와 인간’ 등이 있다. 서울 봉원장로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현재 이화여대와 홍콩 중문대학 명예교수로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