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맹경환] 최영과 성령대군

입력 2011-10-21 17:37

고려 말 명장군이자 재상인 최영 장군의 무덤에는 오랜 세월 동안 풀이 자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왕조를 뒤집고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최영에게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고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권세를 탐한 죄’를 들어 참형에 처하려 했다. 최영은 최후를 맞으며 “평생 탐욕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최영의 묘에는 실제 풀이 자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밤나무 잎이 서서히 떨어져갈 무렵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최영 묘에는 잔디가 가지런히 나 있었다. 속설에는 후손들이 풀을 심어도 심어도 계속 죽다가 1970년대 말부터 풀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영 장군의 원한이 풀려서라는 풍문도 들린다.

최영 장군이 탐욕을 멀리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을 평생 간직한 결과다. 최영은 죽어서도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최원직의 묘는 최영 묘 바로 위에 자리 잡고 크지 않은 공간을 함께하고 있다.

최영 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태종의 넷째아들이자 이성계의 손자인 성령대군 묘가 있다. 입구 안내문에는 ‘성령대군은 어려서부터 태도가 의젓하고 총명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4살 때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 있다. 태종은 아끼던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 하며 친히 제문을 짓고 분묘 옆에 대자암이라는 암자를 짓게 했다고 한다. 태종은 원래 산리동이란 지명도 대자동으로 명명했고 그 이름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령대군의 묘는 물이 마른 도랑과 민가 사이로 난 좁은 길을 한참 올라간 뒤에야 나오는 스산한 분위기의 최영 묘와 사뭇 달랐다. 입구에 큼지막한 사당이 있고, 봉분 크기 또한 조선 왕들의 무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이래서 서로 죽이면서까지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걸까. 한순간 덧없는 상념이 흐른다.

원수지간인 최영과 성령대군의 묘가 이웃해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최영 묘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에는 ‘전주이씨 종손 기증자 이준기’라고 적혀 있다. 이성계의 먼 자손이 내민 화해의 손길에 최영의 원한이 풀리고 묘에 풀이 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맹경환 차장 khmaeng@kmib.co.kr